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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때 루스벨트처럼…오바마, 경제위기 덕 볼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월가 자본가들은 우리 문명의 사원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다가 (위기가 닥치자) 도망치기 바쁜 파렴치한 환전상이다.”

정부 재정 지출을 확대하는 뉴딜 정책으로 대공항에서 미국을 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1933년 3월 4일 취임하면서 한 말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는 29년 터진 대공항이 큰 역할을 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그는 32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 맞붙었다. 루스벨트는 “후버의 경제정책 실패가 금융위기를 몰고 왔다”며 대공항의 직격탄을 맞은 노동자층과 소수인종, 도시 빈민, 남부 백인의 지지를 끌어 모았다. 그 결과 대선에서 57%의 득표율로 후버(40%)를 누르고 당선됐다.

한국전 때 미군을 파병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은 48년 대선 유세에서 월가 자본가들을 “월가에 사무실이 있는 흡혈귀들”이라고 비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경제가 공급 부족과 파업으로 몸살을 앓은 데에는 이들의 농간이 작용했다고 본 것이다. 민주당의 트루먼은 대선 초반 36%라는 낮은 지지율을 기득권 세력에 대한 공세로 반전시켜 빈민층과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대선에서 승리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당선도 경제 부진의 덕을 봤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초 걸프전 승리로 지지율이 80%를 웃돌던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경제 부진으로 92년 대선 때 지지율이 40%로 내려앉았다.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경제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당선했다.

올해도 경제위기가 미 대선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요인으로 등장했다고 NBC방송이 16일 보도했다. 실제로 공화당 전당대회(1~4일) 이후 치솟던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금융위기라는 복병을 맞아 주춤거리고 있다. 금융위기가 세라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 후보의 인기에 찬물을 끼얹는 한편 경제 이슈에서는 매케인보다 지지율이 높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16일 ABC방송의 여론조사에서 오바마는 47%의 지지율로 매케인을 1%포인트 차로 따돌렸다. 이날 공개된 CNN 조사에서는 두 후보 모두 45%로 동률을 기록했다. 라스무센의 여론조사에서는 매케인이 48%로 오바마(47%)를 간신히 따돌렸다. 매케인이 3~5%포인트 앞서던 최근 여론조사에 비해 지지율 격차가 줄어든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6일 “미 금융위기가 오바마에게 새로운 출구가 됐다”고 보도했다. FT는 “메릴린치와 리먼브러더스 등 대형 투자은행들의 합병 또는 파산으로 경제가 대선의 핵심 이슈로 등장했다”며 “이는 최근 2주간 지지율 하락과 공화당의 공세에 시달리던 오바마에게 기회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 최대 채권 거래기관인 핌코의 최고경영자(CEO)인 빌 그로스는 FT와의 인터뷰에서 “경제 부진은 오바마 편”이라며 “나는 공화당원이지만 이번 대선이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이해를 재조정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미국은 대공항 이후 가장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고 있다”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실패한 경제정책에 대한 최종 판정”이라고 비난했다.

매케인은 “미 경제를 뒷받침하는 노동자들이 월가 금융시장을 카지노로 여기는 투기꾼들에게 위협받고 있다”며 ‘월가 비판론’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매케인 진영은 또 TV 광고에서 “경제가 위기에 처했지만 검증된 지도자인 매케인과 페일린이 해결할 수 있다”며 오바마의 경험 부족을 꼬집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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