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명동 역사관을 세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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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인생을 즐기고 젊음을 만끽한다. 거리의 네온사인과 인테리어는 휘황찬란하다. 과거에도 그랬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하루 세 끼 끼니를 걱정하는 찌든 가난이 없고, 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하루를 걷는 고단한 삶이 없다. 생의 ‘비장함’이야, 그 단어가 어색할 뿐이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구한말에는 이조판서 윤정현의 저택이 있던 곳에 들어선 고딕 양식의 명동성당만이 조개딱지같이 엎드려 있던 조선의 집들 가운데 우뚝 솟아 이국적 풍경을 만들었다. 명동이 근대화의 모습을 띠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들어서면서다.

조선을 강탈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20∼30년대 명동은 메이지마치(明治町)로 불리며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의 중심 거리가 되었다.

서양의 문물과 상품이 들어오면서 모던보이·모던걸과 같이 ‘모던(modern)’과 신흥미술·신흥사상처럼 ‘신흥’이라는 단어들이 시대의 첨단인 듯 등장하며 우리의 전통적인 삶을 밀쳐낼 때, 양장과 양복을 걸치고 양품을 사용하며 서양식 레스토랑, 바, 댄스홀, 일본식 요리점, 요정, 기생집 등을 다니는 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삶처럼 보였던 것도 이 명동에서였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연해주로, 간도로 떠난 이들이 무장 독립투쟁을 하며 오매불망 조국 광복을 꿈꾸고 있을 때, 도쿄에서 유학하던 또 한쪽의 삶은 우에노(上野)공원에서 신여성과 자유연애를 하며 조선의 아내를 버리는 생각으로 몸부림쳤다. 이런 모순된 장면의 오버랩은 현해탄의 자살과 명동의 흥청거림처럼 애꿎은 역사가 연출하는 것으로 돌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 모두가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광복 이후 명동은 환희의 거리였고 많은 문인, 예술인, 지식인이 모여 지적 담론을 펼쳐간 공간이었다. 전숙희와 손소희가 연 ‘마돈나’와 ‘오아시스’, ‘돌체’ 다방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철학을 이야기하며, ‘동해루’에서 자장면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시대의 고민을 안고 인생을 논하였다. 낡은 외투 하나 걸치고 낮에는 ‘문예서림’과 ‘모나리자’에 들르고, 밤에는 아무데나 떠들썩한 자리에 끼여 한잔 술을 들이켜는 삶 속에서 문학이 생겨나고 예술이 태어났다.

오상순·서정주·모윤숙·김광균·이용악·김광주·김동리·조연현·김기림·조병화·조지훈·이진섭도 명동의 얼굴이었고, ‘휘가로’에 나타난 김수영도, 서울 명동에 모습을 비친 한하운도 절망과 역사 앞에서 시를 논하며 시대를 아파했다.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에 전쟁까지 겪으면서 명동은 고달픈 지식인의 공간이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인구에 회자하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다. 혜성 같은 명동의 젊은 시인 박인환은 가난 속에서 술병이 쓰러질 때 31세의 생을 마쳤다. ‘보리밭’을 작곡한 윤용하도,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도 모두 빈곤 속에서 허덕이다 저세상으로 갔다. 요즘 부자들 손에서 수십 억원대에 거래되는 화가 이중섭도, 박수근도, 김환기도 고단함 속에서 지친 그림들을 그렸다. 뮌헨의 슈바빙 거리의 추억을 안고 온 전혜린도 대폿집 ‘은성’에 마지막 얼굴을 비친 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70년대 명동은 낭만의 거리면서도 민주화의 열망으로 다시 태어난다. 명동성당은 민주화 실천의 공간으로 역사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날 명동의 흥청거림 속에는 이런 우리의 지난 이야기가 없다. 욕망에 따라 소비하고 배설하는 공간이다. 현재는 과거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한국의 문학과 예술도 지난 명동의 그림자 속에 있다. 명동 거리에 ‘명동 역사관’을 세우자. 그리하여 우리의 지난 삶을 복원하여 보자. 역사를 하나씩 복원하다 보면, 인간의 삶이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듬고 가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어디 명동뿐인가. 부산, 통영, 목포, 대구, 인천에도 우리가 지나온 발자국들이 짙게 남아 있다.

정종섭 서울대·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