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거품경제>上.거품경제붕괴.헤이세이불황 戰後최대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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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고전하던 일본경제가 올해 들어 간신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하지만 2차대전 이후 불패(不敗)의 경제신화를 일궈온 일본인들의뇌리엔 지난 5년간의 기나긴 「헤이세이(平成)불황」 경험이 깊은 상흔으로 자리잡았다.그리고 어째서 이런 시련 이 닥쳤는가에대한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일고 있다.대체로 일본국민들간에는 『정부의 정책대응 실기(失機)가 그 주범』이라는 인재론(人災論)쪽으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일본처럼 경제의 「거품」이 급격히 빠지면서 수출부진.물가고등 빨간 불이 켜진 한국경제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이웃 일본의 이러한 논의를 두차례에 걸쳐 알아 본다.
[편집자註] 지난해 NHK여론조사에서 일본인들은 패전이후 최대 사건으로 거품경제의 붕괴와 5년간을 끌었던 헤이세이(平成)불황을 꼽았다.찬란했던 고도성장이나 두차례의 오일쇼크를 슬기롭게 극복했던 기억은 그 다음 다음이었다.
『일본 경제가 재생하려면 일단 한번 지옥(地獄)에 가봐야한다』는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의 경고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90~95년에 일본이 주식및 토지가격 하락으로 허공에 날려버린 돈은 모두 1천조엔(약7천2백조원).2년치 일본 국민총생산(GNP)에 해당하는 금액이다.또 일본정부는 잇따른 경기부양책으로 올해 세계최대의 재정적자(GDP대비 4.8% )를 기록했으며,은행들은 은행들대로 1만엔권 지폐로 후지산(富士山)을 50개나 쌓을 수 있는 18조6천7백억엔의 부실채권을 떠안게 됐다. 잘못된 경기예측과 뒤늦은 정책대응이라는 지난 6년동안의 인재(人災)가 불러온 결과였다.
92년 8월18일.
여름 휴가를 즐기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총리는 휴가일정을 중단하고 휴양지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밤늦게 도쿄(東京)총리관저로 돌아왔다.일본의 주가는 이날 다시 한번 큰 폭으로 빠지면서 2년8개월만에 무려 60%의 폭락세를 보였고 경기후퇴의 징후가 곳곳에서 확연히 드러나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총리가 주문한 제1차 경기부양책(10조7천억엔 규모)에 대한 대장성과 경제기획청의 반응은 냉담했다.세계제일로 자타가 인정하던 일본 경제관료들은 90년말부터 불황이 시작됐음에도91년 경제백서에서 『우리는 헤이세이경기의 기반 이 의연히 확대기조에 있음을 확신한다』고 선언,이미 첫단추를 잘못 꿰고 있었다.미야자와가 다그쳐 부랴부랴 마련한 긴급경기대책도 임시국회회기를 넘기고 12월을 넘겨서야 간신히 예산에 반영됐다.사카와규빈(佐川急便)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국회를 흔들어 버린 것이다.가나모리 히사오(金森久雄)일본경제센터 이사장은 『그 중요했던4개월동안 일본경기는 식을대로 식어버렸다』고 아쉬워한다.
첫 약효가 먹혀들지 않자 ▶93년 종합대책(13조2천억엔)과긴급경제대책(6조엔)▶94년의 종합경제대책(16조3천억엔)▶95년 엔고 긴급경기대책(18조8천억엔)등 긴급처방이 잇따랐다.
투입금액이 거듭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중앙은행 재할인금리를 연 0.5%까지 인하하는 초강수 금융완화정책을 단행했지만 경기의 고삐는 잡히지않았다.
『불황의 골은 깊어갔다.케인스가 제시한 이래 일본정부가 신처럼 받들어온 금리인하와 공공투자 확대라는 두개의 상비약이 효험을 거두지 못하자 관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사와 다카미(佐和隆光)교토대교수) 사태를 악화시키는데는 정치권도 단단히 한몫을 거들었다.93년 자민당 단독정권이 무너진뒤 들어선 호소카와(細川)내각은 정치개혁을 우선하면서 경제에 눈을 돌리지 않았고,94년에는 건설회사의 잇따른 정치뇌물 스캔들로 정부공사 발주에 제 동이 걸리면서 경기대책이 수포로 돌아갔다.95년에는 고베(神戶)대지진까지 겹쳤다.
***制度피로 부작용 드러나 경제구조가 바뀐 사실을 인식하지못한 점을 패인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다카오 요시카즈(高尾義一)노무라연구소 조사부장은 『일본 경제의 무게중심이 건설.토목에서 자동차.전기쪽으로 이미 넘어갔고 땅값이 너무 올라있어 정부공사 확대위주의 경기대책은 「깨진 독에 물붓기」였다』고 말한다. 또 거품때 해놓은 과잉설비투자와 자산디플레(주가.지가 폭락)의 부담이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초저금리도 당초 기대와는 달리 설비투자를 통한 내수(內需)확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모든 것이 돌변했다.야마구치 요시유키(山口義行)닛쿄대 교수는 『일본경제를 지탱해온 종신고용제.연공서열제등 일본식 경영은 뚜렷한 제도피로(制度疲勞)현상을 보였고 그 부작용이 한꺼번에 드러났다』고 말한다.
고도성장기때의 일본 불황은 보통 1~2년에 끝났다.불황이 닥쳐도 곧 호황이 오다보니 해고보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통한 안정적인 노동력 유지가 비용이 적게 먹혔다.하지만 「정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기업들이 초엔고 속에서 경영 합리화와 감량경영,생산기지의 해외이전을 꾸준히 진행시켜온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90년 달러당 85엔에서 채산을 맞출 수 있던 전기기계는 94년 달러당 74엔까지도 견딜 수 있게 내실을 다져왔으며,수송기계는 같은 기간중 달러당 1백8엔에서 이익을 낼 수 있었던 것을 94년에는 그 손익한계선을 달러당 1백엔까지 로 낮췄다.
〈그림 참조〉 또 일본기업들은 95년의 경우 해외현지 생산액이 수출액을 초과,환율변동에 중립적인 체제를 구축하는데도 성공했다.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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