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金의환향’ 욕심에 지갑만 야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코노미스트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최악의 불경기 속에서 맞는 혹독한 추석이다. 한가위가 아니라 ‘寒가위’라는 말도 나온다. 이런 이유로 ‘금의환향 스트레스’가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럴듯한’ 추석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당당하게 고향 문턱을 넘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다. 문제는 금의환향 스트레스가 ‘왜곡된 소비심리’를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때론 과소비로, 때론 과시욕으로 표출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경기 불황으로 지갑이 얇아지고 있는 이때, 추석의 진정한 의미는 뭘까.


부동산 시행사 A업체는 2004년 법인 설립 후 아직까지 매출이 없다. 반면 지난해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은 각각 33억원, 63억원이었다. 부채는 무려 500억원에 달한다. 무리하게 부동산 PF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본잠식 상태다.

A사의 대표는 직원들에게 “분양만 잘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해 왔다. 그러나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동산 경기 침체는 날로 깊어지고 있고, 대형 건설사들은 줄줄이 분양 일정을 늦추고 있다. A사로선 올해 매출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제 남은 것은 빚뿐이다.

갚아야 할 이자만 해도 매달 2억5000만원에 이른다. 직원 월급은 수개월째 밀렸고, 퇴직자들은 “월급 내놓으라”며 아우성 치고 있다. A사 창립멤버 박철진(37) 전 경영기획실 팀장도 9월 초 사표를 던졌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먹일 ‘분유 값’조차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취업센터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 들렀지만 이렇다 할 소식은 아직 없다. 그는 “경기가 바닥인데 누가 나를 찾겠는가. 하필이면 추석을 앞두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철진 전 팀장은 2남 중 장남이다.

남동생은 비교적 괜찮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 차장이다. 그는 “장남 체면이 말이 아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추석 때 귀향을 아예 포기할 참이다. 전남 순천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서다.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제대한 원영민(33)씨. 그는 신림동 고시원 사장이다. 2005년 장모 돈을 빌려 고시원을 차렸다. ‘대신 2년 안에 사법시험을 패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원씨는 올 사법시험 1차에서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벌써 세 번째 낙방이다. 이제는 아내 보기조차 민망하다. ‘허송세월하는 것 아니냐’‘취직이나 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질책도 견디기 힘들다. 그는 올 추석 경북 상주 처가에 내려가지 않을 계획이다. 내심 ‘변호사 사위’를 바라는 장인어른과 장모에게 낯 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때보다 혹독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그야말로 한가위가 아니라 ‘寒가위’다. 추석 한가위는 한 해 동안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거둔 결실을 조상께 감사하는 민족 최대 명절이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에 관한 책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선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추석)만 같아라’고 했다.

추석은 그만큼 풍성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풍요로운 추석을 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들이 많다. 바로 실업자들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7월 현재 실업자 수는 76만9000명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만5000명 감소했지만 여전히 많다.

이들은 과연 추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인사취업 전문기업 ‘인크루트’와 연봉전문 사이트 ‘오픈샐러리’가 구직자 6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90%가 “추석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가장 큰 스트레스로는 단연 “취직했느냐”(63.8%)는 질문이 꼽혔다. “추석 연휴기간 구직활동을 계속할 수 없어 불안하다”는 대답(14.1%)도 나왔다. ‘추석’보다는 ‘구직’이 먼저라는 것이다.

불황에도 금의환향 욕구는 여전

▶백화점 추석 선물세트 코너에 몰려든 주부들.

구직센터에서 만난 한 실업자는 “빨리 취직해 양복 입고 부모님 찾아 뵙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실업자도 “멋들어진 모습으로 ‘고향 앞으로’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자괴감이 느껴진다”고 하소연했다.

이를테면 ‘금의환향(錦衣還鄕)’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셈이다.‘금의환향’의 사전적 의미는 출세의 상징인 비단옷(금의)을 입고 귀향한다는 것이다. 출세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돈을 많이 벌어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다.

귀향 때 값비싼 선물을 사 들고, 좋은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金의환향’이다. 결국 ‘금의환향 스트레스’는 ‘돈 가뭄’에 기인하게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추석 ‘금의환향’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업자뿐 아니다.

직장인 상황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극심한 경제 불황 탓에 지갑이 얇아져, 적지 않은 돈을 써야 하는 추석 연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인크루트’가 직장인 1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가장 크게 느끼는 부담으로 ‘비용’(37.1%)이 꼽혔다.

고물가·고유가·고환율 등 이른바 ‘3고(高) 현상’ 때문에 가계가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추석비용조차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얘기다. 일례로 지난 7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최고 수준인 5.9%를 기록했다.

8월엔 국제유가 하락에 따라 소폭 둔화된 5.6%를 보였지만 근원물가지수(석유류·농산물 등 가격 변동이 심한 품목을 빼고 계산한 것) 상승률(4.7%)은 8월(4.6%)에 이어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게다가 짭짤한 부가수익 중 하나였던 추석 상여금마저 줄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전국 100인 이상 246개 기업을 조사해 8월 31일 발표한 실태자료에 따르면 올 추석 상여금은 88만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94만9000원보다 6만9000원 줄었다. 이는 고유가와 환율불안 등으로 촉발된 경기침체 때문으로 풀이된다.

주부들의 가슴앓이가 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대문 시장에서 만난 주부 강숙례(39·서울시 송파구)씨는 “추석 상여금까지 줄어 남편의 월급봉투가 얇아졌다”며 “차례상을 어떻게 차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물가까지 올랐으니…”라고 하소연했다.

재래시장에서 ‘공포의 추석 물가’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게 강씨의 말이다. 실제 지난해 추석 무렵 2758원 하던 단감(200g)의 현재 가격은 65.8% 오른 4573원이다. 돼지고기 목심(100g)은 지난 추석 대비 28.4% 오른 1796원이다.

‘전’ 부치는 데 필수적인 밀가루(2.5kg)는 3794원인데, 지난 추석 가격과 비교했을 때 51.6%나 올랐다. 1㎏에 3500원 하던 닭고기도 6400원으로 2배 가까이 올랐고, 차례상에 올리는 과일 가운데 하나인 햇배(700g), 햇사과(300g)도 지난해 추석 대비 각각 22.1%, 47.5% 오른 3381원, 2820원이다.

윤석업 한국물가정보 조사부장은 “이번 추석은 예년보다 조금 빨라 제수용 큰 과일이 부족해 가격이 높은 수준에서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며 “올봄 조류인플루엔자의 영향으로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닭고기와 소비 증가가 뚜렷한 돼지고기도 물량 부족으로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추석비용보다 용돈이 더 부담

문제는 ‘여기까진 약과’라는 점이다. 주부들의 진짜 고민은 따로 있다. 부모님께 추석 용돈을 드려야 하고, 지인들에게 선물도 돌려야 한다. 불경기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게 주부들의 이구동성이다. 김순복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사무처장은 “가계 사정이 좋든 나쁘든 추석 선물과 용돈은 꼭 드려야 한다는 것이 주부들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김 사무처장은 또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 및 선물을 (경기불황이라는 이유로) 줄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며 “동서들 눈치도 봐야 하고, 무엇보다 남편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금의환향’ 스트레스가 과소비를 부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롯데마트가 고객 22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추석 선물 등 경비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3.6%에 해당하는 1438명이 ‘작년 수준 정도로 유지하겠다’고 했고, 4.1%인 92명은 ‘작년 추석보다 늘리겠다’고 답했다.

10명 중 6.77명이 “경기불황에도 추석 경비를 줄이지 않겠다”고 답한 셈이다. 제 아무리 극심한 불경기라도 ‘돈 쓰는 것’만큼은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사례 한 토막이다. K증권사에 다니는 김수정(30)씨. 그는 올 초 신혼살림을 차렸다.

결혼 후 맞는 첫 번째 추석이다. 그래서인지 손윗동서가 무슨 선물을 할지, 부모님께 용돈을 얼마나 줄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시부모는 ‘돈 없으면 그냥 와도 괜찮다’고 하지만 애꿎은 눈총 받을까 두렵다. 김씨는 요즘 백화점 선물세트 선전물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찮다.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한과 선물세트는 최하 4만8000원. 상주곶감 42개가 들어있는 곶감세트는 11만5000원이다. 곶감 한 개당 2700원꼴이다. 수삼더덕 혼합세트는 한술 더 뜬다. 수삼(400g) 8개, 더덕(850g) 10개가 들어있는데 가격은 무려 13만원대다. 개당 7222원인 셈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봉지라면 20개는 족히 살 수 있는 가격대다. 김씨는 “그래도 추석인데 그럴듯한 선물은 사가야 하지 않을까”라며 쓴웃음을 지었다.‘금의환향’ 스트레스는 용돈·선물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다. 때론 ‘부의 상징’으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한때 고급 승용차에 선물을 가득 싣고 귀향한 가장들의 모습은 집안의 자랑이요, 선망의 대상이었다. 추석 즈음에 새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2005년을 기점으로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구희철 자동차공업협회 과장은 “2005년까지는 추석이 되면 신차 구매량이 늘어났다”며 “하지만 2006년 이후엔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자동차업계의 추석 특수는 이제 ‘옛말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중고차 시장 상황은 딴판이다.

추석철만 되면 중고차 시장 관계자들은 때아닌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국내 최대 회원 수(5만 명)를 자랑하는 인터넷 중고차 매매 사이트 B몰에선 8월 중순~9월 둘째 주까지 집계된 대형 자동차 판매량이 연 초 대비 20% 이상 늘었다.

요즘도 대형차 문의전화가 시시때때로 걸려온다는 게 B몰 대표의 말이다. 기아자동차 뉴 오피러스(배기량 3300cc)의 경우 총 42대의 매물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17대가 9월 첫 주에 팔려 나갔다. 총 10대가 매물로 나온 르노삼성의 2008년식 SM7도 같은 시기 6대가 매매됐다.

현대자동차 에쿠스 역시 120대 매물 중 30대가 8월 말~9월 초 팔렸고, 쌍용자동차의 뉴 체어맨 19대도 같은 시기 소비자의 품으로 갔다. B몰 대표는 “고유가 때문인지 3000cc급 이상 대형 세단의 매물이 많아지고 있다”며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가운데 꽤 많은 차가 추석을 앞둔 요즘 팔려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수입차 딜러 김정치씨는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지만 추석 때 중고 대형차 구매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금의환향하겠다는 욕구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렌터카 업계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추석 렌터카라면, 이동이 간편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는 SUV 차량이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다르다. 정작 인기 있는 차종은 대형 세단이다. ‘SUV 승합차인 카니발·스타렉스가 인기종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형 세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게 렌터카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경제성이 가장 뛰어난 아반떼 등 소형차는 아예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렌터카 차종 선택의 우선순위가 ‘경제성’보다는 ‘차의 가치’에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렌터카마저 ‘금의환향’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김연화 한국소비생활연구원장(가정학 박사)은 “금의환향 스트레스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기왕이면 값비싼 선물을 안고, 좋은 차를 타고 기세등등하게 귀향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로 인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원장은 또 “금의환향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구매욕구가 무리한 소비를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작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추석을 계기로 왜곡된 소비문화를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과시욕에서 비롯된 소비보다는 합리적인 소비행태를 갖자는 말이다.

김연화 원장은 “살기 힘들다고 푸념하면서 정작 추석 때만 되면 백화점에 가서 고가선물을 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추석을 ‘감사절’ 정도로 여기고 정을 나누는 명절로 인식한다면 돈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허경옥 성신여대 가족문화소비자학과 교수도 “돈에 지나치게 연연해서도, 과시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며 “추석을 가족과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기회의 장으로 삼는 게 좋다”고 말했다. 물론 올해 추석의 소비행태는 이전과 사뭇 다르다.

고물가와 불경기 탓인지 ‘실속형’ 선물세트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10만원 안팎의 실속형 선물세트 판매량이 지난해 추석 대비 35%나 늘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도 “예년보다 10만원 미만의 선물세트가 잘 팔리는 것을 보면 소비가 위축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박철 한국공공자치연구원 연구원은 “백화점 매장엔 여전히 사람이 붐비는 반면 추석비용을 최대 40%까지 아낄 수 있다는 재래시장은 꽁꽁 얼어붙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일본 경제 애널리스트 다치키 마코토(立木信)는 자신의 저서 『일본을 통해 본 부동산 10년 대폭락 시나리오』에서 ‘Going Back to the 1960’s Life’를 주장했다. 일본의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1960년 소비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좀 더 오래 타고, 한 달에 세 번 하던 외식을 두 달에 한 번꼴로 줄이는 식으로 말이다. 최악의 불경기 속에서도 ‘금의환향 스트레스’에 따른 과시욕이 넘치는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말이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J-HOT]

LG 트윈스 몰락의 이유 "선수들, 성골-진골 따지고…"

송해, 17년 교통 프로 진행중 외아들 교통사고로 잃어

장성택, 김정일에 "李대통령 만나기 전엔 죽으면 안됩니다"

정선희 "내 사랑 이제 편히 쉬세요. 사랑해, 사랑해요"

김연아 어느덧 여성미 물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