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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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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 33면

‘외식하는 자’의 희랍어 단어는 ‘히포크리테스’인데 그 어원은 ‘배우’라는 말에서 왔다. 배우가 표현하는 세계는 실재(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모방의 모방일 뿐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너무 많은 악역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악역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로부터 드라마를 추방시킨다. 그렇지만 희랍 사회에서 드라마의 인기는 플라톤 철학보다 훨씬 높았다. 저 밑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면 전체 5000명 관객석에 거의 동일한 음향으로 울려 퍼진다. 당시는 야외라도 소음 데시벨 수준이 낮았던 데다 좌석 밑이 공명 튜브 역할을 하여 놀라운 음향효과를 낸다. 저 밑의 둥근 바닥을 오케스트라(orkhestra)라고 하는데 그곳이야말로 코러스와 춤 공연이 이루어지는 주 무대였다. 우리가 아는 무대는 프로스케니온(proskenion)이라고 부르는데 무대장치가 주로 그곳에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현대적 개념의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이곳은 예수가 다녔던 데가볼리 10개 도시 중 하나인 제라시(Jerash), 놀랍게 화려한 폴리스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얻는 얍복강 위로 있다. 제라시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해설. 추석을 정다웁게 보내십시오. 임진권 기자

제6장
1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음식 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2 예수께서 가라사대,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 3 그리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4 모든 것은 하늘 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5 감추인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고, 6 숨겨진 것은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

72. 히포크리테스의 경건

1 His followers questioned him and said to him, “Do you want us to fast? How should we pray? Should we give to charity? What diet should we observe?” 2 Jesus said, “Do not lie, 3 and do not do what you hate, 4 because all things are disclosed before heaven. 5 For there is nothing hidden that will not be revealed, 6 and there is nothing covered up that will remain uncovered.”

본 장의 내용 역시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모습과 전혀 상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관복음서의 원래적 맥락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더해 준다. 본 장의 내용은 반드시 마태복음 6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과 같이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 6장의 이 부분은 매우 조직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1절에 총론적인 언급이 있고, 그 나머지 부분에 전통적인 유대교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표상인, 세 가지 행위양식에 관한 구체적인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그 세 가지란 ①구제(Alms) ②기도(Prayer) ③단식(Fasting)이다.

마태 6장 1절의 내용은 우리가 한번 새겨볼 만한 소중한 말씀이다. 요즈음 같은 세태에서는 우리 가슴에 더욱 신랄한 경종의 외침으로 파고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義)로움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보이려고 행한다면 너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Be careful not to do your ‘acts of righteousness’ before men, to be seen by them. If you do, you will have no reward from your Father in heaven. NIV).

객석 밑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통로들이 있다.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이런 데서 사람들이 만나 노닥거리다가 자기 자리를 찾아갔을 것이다.

종교란 본시 ‘의로움의 행동(acts of righteousness)’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새로운 의로움은 낡은 의로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다. 마태 5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로움이 바리새인이나 율법의 교사들의 의로움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결단코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엇이 다른가? 외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내면에서 끊임없이 심화된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추구와 발견’이다.

나의 의로움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적인 사람들이 그 의로운 행동을 겉으로 사람들에게 내보이기 위하여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 드러내는가? 그들이 의로운 행동을 하는 궁극적 목적이 사람들의 상찬(賞讚)을 얻고자 함에 있고, 하나님의 상완(賞玩)하심을 얻고자 함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사회적으로 공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공적인 매체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내비치는 것을 삼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하나의 종교가 국체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운동선수들이 승리의 순간에 천진난만한 환호의 기쁨을 발하는 것은 아름답게 봐줄 수 있지만, 유별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것은 삼가도록 감독이나 코치들이 지도할 필요가 있다. 나의 기쁨의 순간에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인 상대방이 슬픔을 맛보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경기에 있어서의 승리란 나를 지원하는 이 땅의 사람들과 그 기쁨을 나누어 가질 사안이지 매 순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할 사안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예수님 본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너희가 구하기 전에 이미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5~8).

여기 개역한글판 번역인 ‘외식하는 자’의 ‘외식(外飾)’이라는 뜻은, 겉으로만 장식한다는 뜻이다. 그 희랍어 원어는 지금 우리가 영어로 위선자(hypocrite)라는 뜻으로 쓰는 히포크리테스(hypokrites)인데, 그 원래의 뜻은 ‘배우’이다. ‘위선’이란 고대 희랍어에서 ‘무대 위에서 역할을 행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지적에 따르면 진리 그 자체를 행하는 것이 아니요, 진리인 척 쇼를 하는 것을 말한다.

위선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선을 가장하지만 실제로 악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 부류는 자기의 악랄함을 인식하고 있다. 둘째, 자신의 가장적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경건한 사람들이며 자신의 기만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셋째, 자신의 가장하는 행동이 하나님과 대중을 위한 최선의 방도라고 믿으며 대중을 의도적으로 기만한다. 궁핍한 자들을 위해 많은 선행을 행하지만 선행을 하면 할수록 궁핍한 자들의 상찬을 더 얻으면서, 더욱더 자기 기만으로 빠져들어 간다.

예수가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 예수는 인간세의 상찬과는 관계없는, 내면의 은밀한, 나 실존의 하나님과의 소통만을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계시며, 은밀한 가운데 보시며, 은밀한 가운데 갚으시는 친근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예수는 과연 그를 따르는 자들이 ‘종교적이기를(being religious)’ 바랐을까? 그는 유대민족의 모든 종교적 행동 패턴에 신물이 난 사람이었다. 과연 예수가, 역사적 예수가 오늘과 같은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을까? 당시 종교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제와 기도와 단식을 해야만 했다. 나팔 불면서 구제하고(마 6:2), 남 잘 보이는 큰 거리 어귀에 ‘서서’ 중언부언 큰소리로 기도하고(마 6:5~7), 온갖 흉한 얼굴로 슬픈 기색을 내보이며 단식하는(마 6:16) 모습이야말로 당대 경건한 종교인의 표상이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운동은 근원적으로 제도적 종교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이었다.

그것을 도마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외식으로 꾸미려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닐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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