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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선 우아하게, 물 밑에선 치열하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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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 26면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한 예비입찰이 마감된 12일 오후. 포스코·GS·현대중공업·한화의 인수 태스크포스(TF) 사이엔 “의향서에 적어낸 금액에 산업은행이 다소 실망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8조원을 넘어설 것이란 산업은행의 기대와 달리 4개 기업 모두 7조원에 못 미치는 금액을 써 냈을 것이란 추측성 설명이 덧붙여졌다. 한 TF 관계자는 “인수 명분이나 자금 동원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각 그룹이 치열한 눈치 경쟁을 하다 보니 금액이 비슷해졌을 것”이라며 “최고경영자(CEO)나 대주주가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인수 경쟁을 좌우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우조선 매각이 본선 무대에 오르면서 인수전에 나선 네 그룹 총수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대형 인수합병(M&A)의 특성상 최고 책임자의 결단이 딜(거래)을 좌우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네 그룹의 외형이나 자금 동원 능력만으론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지난해 말 현재 포스코의 재계 순위(자산 기준, 공기업 제외)는 6위다. 이어 GS(7위)·현대중공업(8위)·한화(12위)가 뒤를 쫓고 있다. 네 그룹 모두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포스코와 현대중공업은 독과점 우려, GS와 한화는 업종 경험 부족이 지적된다.
 
‘강철도 녹이는 스마일맨’
11일 오전 포스코의 월례 운영회의. 서울과 포항·광양을 화상으로 연결해 전직원이 시청하는 이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이구택 회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오늘은 특별히 보고드릴 일이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 회장은 “1년 이상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는 게 좋다고 생각돼 내일 의향서를 낸다”며 “단순히 포스코뿐만 아니라 대우조선해양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물어올 때 회사 입장을 잘 정리해 답변해 달라”고 발언을 마무리했다. 개인플레이보다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그의 성향이 묻어 나는 대목이다.

이 회장의 성향은 그동안 대우조선과 관련해 해 온 발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2006년 9월 김창록 당시 산업은행 총재가 “국가 경쟁력과 기술 유출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면 포스코가 대우조선을 인수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당연히 재계의 시선이 포스코에 집중됐다. 하지만 이 회장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며 말을 흐렸다. 이후에도 “시너지 효과가 있다면 검토해 볼 수 있다”며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던 그는 올 1월이 돼서야 “관심이 있다”며 인수 참여를 공식화했다. 충분한 내부 검토와 공감대 형성에 1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이 회장은 항상 웃는 얼굴이면서도 원칙과 뚝심을 잃지 않는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래서 ‘강철도 녹이는 스마일맨’이란 별명을 얻었다. 치밀한 논리와 설득을 바탕으로 한 ‘감성 경영’이 특기다. 대주주가 아닌 전문경영인이면서도 사내에서 웬만한 오너 회장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포스코’라는 광고 카피에 빗대 ‘소리 없이 포스코를 움직이는 이 회장’이란 말도 나온다. 포스코 관계자는 “그동안 스마일로 내부 결속을 다져온 이 회장이 인수 선언 이후엔 강철을 녹이는 뚝심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말단 직원부터 박태준 명예회장까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게 포스코에 대한 금융권과 재계의 평가다.
 
‘조용한 2인자’ 벗어날까
‘조용한 2인자’ ‘국제신사’. 허창수 GS그룹 회장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수식어다. LG그룹 우산 아래 구(具)씨 가문과 57년간 동업하면서 허(許)씨 가문은 스스로 2인자의 위치를 고수해 왔다. 고(故) 허만정-준구 회장에 이어 허창수 회장도 ‘절대 앞에 서지 마라’는 유훈을 따랐다. LG 시절 허 회장은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함께 다닐 때 카메라가 보이면 슬그머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구 회장을 돋보이도록 한 배려였다.

그런 그에게 대우조선 인수는 알 껍데기를 깨기 위한 도전이다. 2005년 3월 독립한 그룹의 신성장동력 확보는 물론 보스로서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3년간 인수합병(M&A)에 참여할 때마다 쓴맛을 봤던 아픈 추억을 단번에 털어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GS는 하이마트·대한통운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시거나 스스로 물러서는 아픔을 겪었다. 대우조선 인수에 각별한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GS는 대우조선 인수 전담 팀을 꾸린 뒤 100여 차례에 걸쳐 일본·중국의 해운·조선업계 실무진과 선박 브로커들을 만났다. 조선업 ‘공부’를 위해 부장급 간부를 스코틀랜드에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 회장의 스타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앞에 나서 대우조선을 거론한 적이 아예 없다. “필요한 투자를 두려워하거나 실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2008년 신년사), “일단 전략적 선택을 했으면 가용한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 확실한 경쟁우위를 확보해야 한다”(2008년 4월 임원 모임)고 에둘러 표현했을 뿐이다. 전문경영인에게 현안을 맡기고 뒷전에 물러서 큰 그림을 챙긴다.

허 회장의 고민은 상대적으로 열세인 자금 동원이다. GS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실탄’은 현대중공업이나 포스코보다 적은 2조원대다. 그룹 주력사인 GS칼텍스에서 1100만 명에 이르는 고객 정보가 유출된 것도 예기치 못한 걸림돌이다. 기업 이미지는 주요한 평가 항목이다. 이번에도 M&A에 실패하면 특유의 보수적이고 신중한 기업문화가 그룹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회사가 잘하고 있지 않느냐”
“회사가 잘 알아서 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않다면 몰라도.”
대우조선해양 인수와 관련해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11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사옥에서 만난 정 의원은 “(M&A라면) 회사에 물어봐야지”라면서 현대중공업과 선을 그었다. 자신은 회사의 주주일 뿐이며 경영에는 전혀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정 의원은 “나는 (현대중공업의) 대표가 아니다. 주주일 뿐”이라며 현대중공업과 거리를 둬왔다.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에 발길을 끊은 건 2002년 가을부터다. 고문 자리를 내놓으면서 지분 10.8%를 가진 대주주로 물러났다. 현대중공업 이수호 부사장은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인수전은 정몽준 의원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영을) 잘하고 있지 않다면 몰라도”라는 얘기는 최고경영진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회사가 잘하고 있지 않느냐”는 말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권 실력자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라는 정치적 입지를 감안하면 현대중공업의 M&A 참여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큰 꿈을 꾸고 있는 그가 마이너스라고 생각하면 입찰 참여부터 성립할 수 없다.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에 이번 인수전 참여는 꽃놀이패다. 우선 세계 3위 조선회사의 장부를 마음껏 열어볼 수 있다. 돈의 흐름이나 계약 정보는 물론 초대형유조선(VLCC)·LNG선·해양설비 등 대우조선이 강점을 가진 분야까지 두루두루 들여다볼 수 있다. 대우조선을 품에 넣으면 세계 시장의 19%를 차지하는 독보적 입지를 굳히게 된다.

문제는 시장의 시선이다. ‘정치인 정몽준’은 둘째 치고 독과점 이슈가 남아 있다. 대우조선 노조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을 인수하면 현대중공업 그룹은 국내 조선 시장 점유율이 51.5%가 된다. 대우조선 노조는 인위적 구조조정, 기술 유출 등의 문제를 들어 현대중공업의 M&A 참여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잠행하는 ‘다이너마이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통한다. ‘다이너마이트 김’으로 불렸던 부친 고(故) 김종희 회장처럼 폭발적인 에너지를 자랑하며 기업을 키웠다. 1981년 29세의 나이에 그룹 총수에 오른 뒤 전문경영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생명 등 굵직한 M&A를 성사시켰다. 대우조선 인수에서 한화그룹보다 김 회장이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하반기 그룹 경영전략회의에서 “대우조선을 인수한다면 과감한 투자와 혁신적인 비전을 실현하겠다. 아무리 잘 만든 배도 프로펠러가 부실하면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없는 것처럼 한화야말로 대우조선의 강력한 프로펠러가 될 수 있다”며 프로펠러론을 제시했다. “한화그룹의 ‘제2 창업’이라는 각오로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총력을 기울여 달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자신이 앞에 부각되는 것을 극구 꺼리고 있다. ‘프로펠러론’과 ‘제2 창업론’도 임원들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됐다. 지난해 폭행 사건 뒤 사면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이너마이트의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인수를 준비하는 그룹의 시스템도 달라졌다. “회장의 결심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상의하달식이 이전 방식이라면 이번엔 실무팀의 의견을 모아 회장이 선택하는 하의상달식”이란 게 인수팀 관계자의 말이다. 대한생명 인수 당시 20~30명에 불과했던 인수팀은 계열사와 외부 자문사를 합쳐 100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인수 의지 못지않게 ‘적절한 가격’을 강조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 같은 변화를 ‘나이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 회장은 요즘 임원회의에서 자신의 생각을 먼저 드러냈던 이전과 달리 전문경영인들의 말을 먼저 경청한다는 게 그룹 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결정적 고비에선 결국 승부사적 기질이 드러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한생명 인수 당시 그는 정부가 인수 가격을 두 배로 올렸지만 과감한 베팅을 선택했다. ‘과일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나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따먹을 생각만 해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는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 본능을 배워야 한다’는 그의 어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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