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준 아내에게 금메달 바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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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열린 베이징 장애인올림픽 남자육상 400m T-53 결승전에서 홍석만이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하루 훈련을 마치면 끊어질 듯한 통증이 허리를 강타한다.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허리를 숙인 채 쉴 새 없이 휠체어 바퀴를 돌리는 장애인육상은 그렇게 인내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국 장애인육상의 간판 홍석만(33·제주도장애인체육회)은 지난 4년간 주위의 무관심과 싸워가며 트랙을 꿋꿋이 지킨 끝에 패럴림픽 2연패를 이뤘다.

11일 오후 중국 베이징 궈자티위창(패럴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육상 남자 400m T-53(휠체어 트랙종목) 결승전은 홍석만을 위한 경기였다. 출발신호가 울리자마자 무섭게 속도를 낸 그는 단 한 순간도 리드를 뺏기지 않고 맨 먼저 결승점을 통과했다. 전광판에 48초 86이란 세계신기록을 새겼다. 궈자티위창에서는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베이징 올림픽 때 이곳에선 단 한 번도 애국가가 울리지 못했다.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육상이 취약한 한국에서 홍석만은 독보적인 세계 톱 클래스급이다. 2004 아테네 패럴림픽에서 200m와 400m를 석권한 그는 2006년 범태평양장애인게임에서 400m, 800m, 그리고 지난해 스위스 휠체어시리즈 200m와 400m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홍석만은 가장 먼저 자신을 든든히 지켜준 가족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우승 후 인터뷰 도중에 아내와 아기 생각이 많이 났다. 16일이 아이 생일인데 돌 때를 제외하고는 생일을 지켜주지 못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돼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홍석만의 가족사랑은 각별하다. 부인 이데 에쓰코(35)와는 국경을 넘는 사랑으로 2005년 6월 귀한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98년 일본 오이타 국제장애인휠체어마라톤에서 선수와 자원봉사자로 처음 만났다. 그 뒤 전화와 편지로 마음을 교환했으나 2000년 이데가 학업을 위해 이사를 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러나 2004년 기다리던 편지가 날아들었다. 이데의 마음이 담긴 편지 속에는 ‘답장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알고 마음을 접겠다’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하늘은 그렇게 인연을 이어줬고, 둘은 마침내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3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에다 외국인인 사위를 이데의 가족들이 좋아하기는 쉽지 않았다. 홍석만은 “장인·장모의 반대가 심했는데 꿋꿋이 나를 지켜준 에쓰코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데는 2005년 결혼 뒤 미국 유학길에 오른 홍석만을 적극 밀어주었다.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로 유학을 떠난 홍석만은 먼저 자리를 잡은 뒤 1년 뒤 가족을 부르겠다는 다소 매정한 계획을 세웠지만 부인은 이를 묵묵히 지원했던 것이다. 당시 홍석만은 전문 휠체어 육상단 선수로 뛰면서 공부를 병행해 미국의 선진적인 장애인 스포츠를 배우려 했다. 하지만, 장애인 팀이 아마추어 수준이었고, 더구나 혼자 집을 지키는 부인이 걱정돼 결국 한 달 만에 유학을 중도 포기했다.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홍석만은 그래서 더욱 열심히 휠체어 바퀴를 굴린다. 그는 “예전에는 메달을 따든 안 따든 그만이었다. 혼자 먹고 사는 터라 상관없었다. 그런데 가족이 생기면서 나의 경기결과에 따라 가정형편이 달라지게 되자 책임감이 저절로 생겼다”라고 말했다.

‘트랙은 나의 직장, 육상은 나의 직업’이란 게 홍석만의 철칙이다. 뛰어난 실력 덕에 그는 장애인 스포츠 선수 중 드물게 전업 스포츠맨으로 살고 있다. 가장으로서 생계는 자신의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연습벌레가 된 것이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홍석만은 제주도개발공사의 후원을 받고 있다. 물론 중소기업 직원 정도의 넉넉잖은 보수이지만 아테네 패럴림픽 때 딴 금메달 연금에다 그의 투혼에 감동한 개인·기업 후원인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 홍석만은 결코 외롭지 않다.

장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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