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 묻힌 산처녀 기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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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82년 겨울 충북대산악연맹 동계훈련을 준비하면서 현옥이를 처음 만났습니다. 체구가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큰 안경을 낀 여학생이 눈에 띄더군요. '저 체구로 50㎏이 넘는 키슬링(뚜껑이 없고 양 옆에 큰 주머니가 있는 등산용 배낭)을 메고 3주간 설악산에서 진행되는 동계훈련을 잘 마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앞섰어요."

'산악인 지현옥 5주기 추모제' 준비위원장인 남기창(南基昶.63.청주대 환경공학과)교수는 지현옥씨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지현옥씨는 91년 서원대 산악부를 이끌고 곤륜산맥의 무즈타그아타(7546m)를 등정했으며 93년 에베레스트(8850m) 정상을 밟았다. 97년 가셰르브룸Ⅰ봉(8068m)에 올랐고, 98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가셰르브룸Ⅱ봉(8035m) 무산소 단독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99년 안나푸르나(8091m)를 등정하고 하산하던 중 실종됐다. 실종 당시 39세.

南교수는 "그가 무즈타그아타 원정을 떠나기 전 유자차를 팔고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까지 부족한 원정 경비를 마련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면서 "그의 산에 대한 열정은 이처럼 뜨거웠다"고 회상했다.

"그가 13명의 여성 대원을 이끌고 떠난 에베레스트 원정은 그동안 남성 위주로 이뤄졌던 히말라야 등반을 여성들 앞으로 성큼 끌어당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현옥이가 숨진 이후 한국 여성 산악계는 다시 침체에 빠졌습니다."

南교수는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산악계는 지현옥 이후 세계적인 여성 산악인 육성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현옥 추모제는 충북산악연맹과 서원대 주최로 매년 조령산에서 열린다. 서원대 총동창회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해 교내에 흉상을 세울 계획이다. 트렉스타가 후원하는 이번 추모제는 29일 오후 7시 서울 명동 YWCA에서 열린다.

청주=김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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