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세계 舊질서에 도전하는 개도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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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군축(軍縮)회의에서 포괄핵실험금지협정(CTBT)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는 61개 참가국들은 이론상제1차 시한인 6월말까지 합의문을 도출해야 했다.그러나 협상은실패로 끝났다.
수개월에 걸친 협상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핵실험도 금지하는 CTBT초안에 합의를 이룰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협상 당사국들은 의장의 소집에 따라 이달 29일 다시 최종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지만 새로운 변수가 없는 한 오는 9월 유엔 총회에 초안을 제출하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논쟁은 표면상 복잡하고 전문적인 사안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쟁점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번 협상의 걸림돌은 정치적 문제로 귀착된다.
그것은 국제 무대에서 새로운 질서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후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인도는 제네바 협상에서 합의를 이루어낼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선진국 그룹인 북(北)에 맞서 개도국 그룹인 남(南)의 이익을대변했다.
인도 대표는 미.러.영.중.프랑스 등 현재 핵무기를 보유한 5개국이 자신들의 핵무기를 파괴하지 않는 한 인도의 핵실험을 금지하는 어떤 합의문에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인도는 자신들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며 워싱턴.런던.모스크바가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이같은 주장을 통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는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 이른바 신규 핵개발국들의 대변인임을 자처하는 동시에 기존 핵질서에 반대하는 남쪽 세력의 중심국가로 나섰다.
CTBT가 구축하려던 것은 핵무기에 대한 독점권을 기존 핵보유 5개국에만 계속 보장하면서 냉전시대의 상황을 고착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인도는 이러한 상황을 거부한다고 잘라 말했다.
따라서 핵실험 금지에 관한 논쟁은 선진.개도국간 전투라는 성격을 띠게 됐고 공개적 지지를 자제했으나 중국등 대다수 아시아국가들은 인도 뒤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양상이다.개도국들은CTBT가 핵보유 5개국에 유리한 핵의 불균형 상태를 영구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번 제네바 협상은 「교역의 세계화」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부상한 국가들이 핵무기 분야에서도 정치적 무게를 과시한 무대중의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남쪽은 경제발전을 통해 이제 국제정치적 역량을 갖추게 됐다.
남쪽은 독립노선을 추구하던 시대의 제3세계 사회주의 이론에 의해 커진 것이 아니라 경제 자유화에 의해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성장으로 구시대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는 크게 동요하고있는 것이다.
최근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서방 선진7개국(G7)정상회담에서『교역의 세계화에 제동을 걸자』는 시대착오적 이야기가 나온 배경도 이같은 맥락이다.이 자리에 브라질이나 인도등 구시대의 질서를 흔든 주역들은 물론 참여하지 못했다.그러나 이들은 제네바협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G7에 충분히 각인(刻印)시켜 놓은것이다. [정리=고대훈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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