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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문화로서의 골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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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시기는 불행하게도 이 곳이 세계 골프의 중심이 되는 브리티시 오픈 시즌과 맞물려 있었다. 우리나라 여행사들도 브리티시 오픈 참관과 명문 골프장 라운드를 엮어 고가의 패키지 상품을 판매하듯 전 세계 골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낸 이 고가의 패키지 상품들이 스코틀랜드의 명문 골프장을 북적대게 만들고 있었다. 부킹 없이 움직이는 우리에게는 대략 난감한 시즌이 도래한 것이다.

2004년 브리티시 오픈 개최지였던 로열트룬 골프장. 세계 100대 코스 중의 하나이며 스코틀랜드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순위를 자랑하는 이 골프장은 부킹이 힘들기로도 유명하다. Visitor를 받는 요일도 한정되어 있고 2개월 전에 날짜를 확정한 신청서와 핸디캡 20 이하의 인증서를 제출하고 Deposit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일정은 두 달 전에 날짜를 확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이 절차를 밟을 수 없었다. 그린피는 일인당 220파운드. 영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비싼 그린피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 비싼 그린피에도 불구하고 골프 성지 순례를 온 전 세계 골퍼들로 인해 골프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풀부킹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골프장 옆 호텔에 숙소를 잡고 저녁 9시에도 아직 한창인 여름 해가 아까워 골프장 답사에 나섰다. 여느 골프장들과 마찬가지로 직원들은 모두 퇴근을 해버렸고, 코스는 무방비 상태로 오픈 되어 있었다. 카트 길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심지어 운전면허 준비를 하는 연수 차량이 코스 깊숙이 들어와 운전 연습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골프의 Driver 연습을 운전용 Driver 연습으로 착각한 선량한 초보 운전자가 아닐런지…. 그렇지 않고서야 우째 이런 일이…. 높은 담에 무인 경비 시스템을 가동하며 삼엄한 경비를 해도 시원찮을 세계적 명문 코스가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되다니…. 양치기 목동들의 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스코틀랜드의 골프는 분명, 관리되고 격리되어야 하는 저 높은 곳의 무언가가 아닌,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는 문화의 일부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백야 시즌이 마무리 되어가는 즈음이지만 스코틀랜드의 태양은 수평선에서 어지간히도 오래 버티고 있었다. 수평선에 걸린 태양빛은 60도 웨지처럼 지평선을 예리하게 깎아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페어웨이의 굴곡은 잔잔한 바다 물결처럼 드라마틱하게 살아났다. 석양이 내려앉은 그린은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눈부셨다. 일단 공이 빠지면 웬만해선 회복이 불가능한 항아리 벙커의 둘레는 사관생도들의 앞머리처럼 딱 떨어지는 각이 서 있었다. 사진 속에 금빛 코스를 배경으로 사람을 담고 싶어 코스에서 1인 라운드 중인 실루엣을 향해 계속 카메라를 들이댔다. 실루엣의 주인공이었던 할아버지는 카메라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시더니 트롤리를 끌고 황급히 사라지셨다. 아마도 도둑 골프를 즐기시던 동네 어르신 같았다.

어떻게든 내일 로열트룬의 라운드를 사수해야 한다. 그날 밤 '로열트룬 사수하기'를 위한 작전 수립으로 우린 금쪽같은 잠을 줄여야했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남편은, "최악의 경우 너 혼자만이라도 라운드를 해. 한 명 정도는 끼워줄 수 있을거야. 난 갤러리로 따라 다니거나 차에서 자고 있어도 괜찮으니까..." 마치 전쟁에서 총상을 입고 쓰러진 전우가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동료의 등을 떠미는 비장한 눈빛... 바로 그것을 연출했다. “당연하지.” 내 대답은 단호했다. 로열트룬 코스는 부부의 의리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그 날 밤에는.

다음날, 작은 동양인 여자가 골프장 매니저에게 그동안 로열트룬에 품었던 로망을 슬픈 눈빛과 촉촉한 목소리로 전했다. 역시나 정이 많은 스코티쉬 매니저는 예약 리스트를 뒤적인 끝에 2명으로 구성된 팀을 찾아 우리를 조인시켜 주었다.

대개의 명문 골프장은 핸디캡 제한이 있고 1번 홀에 스타터가 상주하며 코스와 로컬 룰을 설명해준 후 한 명 한 명 티샷을 지켜본다. 코스를 처음 대면하는 골퍼 입장에선 이것도 상당한 압박이었다. 우리네 드라이버 샷이라는 것이 어찌 매양 곧바로만 나가는 것이던가? 그러나 로열트룬에 대한 나의 뜨거운 열망은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불꽃 샷으로 뿜어져 나왔고, 남편은 그 얄팍한 종이장 멘탈과 나약한 새가슴에도 불구하고, 1번 아이언으로 믿어지지 않는 직선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순조롭게 출발했다. 미국 미조리에서 건너왔다는 코믹한 변호사 아저씨와 아름다운 스윙을 가진 그의 아들 제시와 함께...

첫 홀의 파 펏이 홀을 훑고 나오면서 보기로 출발한 코스의 전모는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갔다. 링크스의 잔디는 아무리 명문 코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태생이 거칠다. 필시 내륙형 골프장의 잔디가 온실 속의 화초라면 링크스의 잔디는 들판의 잡초다. 또 소금기를 품은 바닷 바람에 염장과 탈수를 반복한 토양은 까딱 잘못하여 뒷땅이라도 내려치면 온 몸에 전율이 전해질 정도로 딱딱하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러프는 헝클어진 머리결처럼 엉켜 볼을 삼키면 뱉어낼 줄을 몰랐다. 걷잡을 수 없는 바닷 바람은 드라이버 샷을 150야드에서 급강하시키기도 하고 똑바로 가던 공도 해안 절벽으로 끌어가 버리곤 했다.

정말 거칠고 어려운 코스였다. 거의 모든 페어웨이가 러프로 끊어져 있어 안심하고 샷을 할 수가 없었다. 시그니쳐 홀인 8번 홀은 126yd의 짧은 파 3홀로 브리티시 오픈이 개최되는 모든 코스를 통틀어도 가장 짧은 홀이다. 그렇다고 호락호락하다면 그게 어디 시그니쳐 일까? 그린이 'Postage Stamp'라는 별칭이 붙었을 만큼 작다. 우리 앞 팀은 3 ball팀에 각자 1 인 1 캐디를 쓰고 있었다. 장정 6명이 그린에 오르자 그 실루엣은 만원 버스를 연상시켰다. 역시나 우리 팀 전원이 온그린에 실패했다.

스코어는 홀을 거듭할수록 복리식 적금처럼 늘어갔고 냉혹한 코스에 대한 추억은 가지 수를 늘려갔다. 말로만 듣던 스코틀랜드 링크스에서의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하루였다.

이다겸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