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천천히'가 아름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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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강과 내는 거대한 하수도,바다는 그 하수의 종말처리장이 되고있다.발밑은 대강대강 연결해 적당히 묻은 가스관이 거미줄처럼 깔린 「지뢰밭」이다.공기는 말이 공기지 좀 과장하면 독가스라고할 만하고,먹는 문제만은 해결했다 여겼더니 이 제까지 먹은 쇠고기의 상당 부분이 병든 소,죽은 소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최근 우리들이 확인했던 우리 사회,우리 삶의 단면들이다.이런 단면을 거듭해 접하노라면 경제성장은 과연 무엇을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세계 몇 위니 하며 자랑할 자격이 과연 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에 사로잡힌다.강과 바다,산과 들을온통 못 쓰게 만들고 단지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죽일 정도로인간성마저 황폐해진 결과로 얻은 것이 경제성장이라면 그런 경제성장은 차라리 거부하고 싶다.
우리들은 아직도 경제성장에 대한 자부심에 취해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고 있다.한때는 『한국을 보라』『한국을 배우자』를 구호로 삼기도 했던동남아국가들이 성수대교.삼풍백화점이 내려앉고 강 에서는 이틀이멀다 하고 죽은 고기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한국은 우리의 모델이 아니다』며 고개를 돌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난해 「인간 안보」라는 주제 아래 세계 정상들이 모였던 코펜하겐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껏 자랑하며 후진국들이 한국을 발전모델로 삼을 것을 권한 바 있다.그러나 GNP규모로는 세계 15위인 나라가 복지수준에서는 세계 70위인것을 알고는 코웃음을 치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진 바 있다.이런 평가가 그저 떠도는 이야기 차원의 것만도 아니다.93년 세계은행이 낸 「동아시아개발보고서」는 한국의 경제발전모델이 제3세계모델로는 『필요하지도 않고 적절하 지도 않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물론 우리들이 마냥 자괴감(自愧感)에만 빠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경제성장이 가져다준 과실이 큰 것도 사실이고 또 이제 와서 지난날의 경제개발방식을 탓해 봤자 이미 저질러진 일이 달라질 수도 없을 것이다.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 이 지난 시대 국가경영방식의 문제점을 거의 매일 같이 눈으로 확인하고 있고 외부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의 국가경영방식은 개발독재시대나 스스로 문민시대라고 하는 지금이나 본질적으로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다 .
그 좋은 보기가 썩은 시화호(始華湖)물을 서해로 방류해 버리려 한 사건이다.공업용수로도 쓸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며 육안으로도 50㎝ 밑도 안 보이게 썩은 물을 무려 8천1백만이나바다로 쏟아 부으면 엄청난 바다오염과 어장피해가 빚어지리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이런 일을 당국은 시화호가 썩어 간다는 지적을 받자마자 무슨 묘방이나 되는양 앞뒤도 재지 않고 자행하려 했던 것이다.이 무모함과 뒷 일이야 어찌 되든 우선 눈앞의 문제 는 없애버리겠다는 눈가림행정이야말로 개발독재시대의 유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큰 사고,큰 사건이 벌어졌다면 마치 무슨 처방이나 되는 양 『철저히 예방하라』『엄중 문책하겠다』는 지시와 지적이 뒤따른다.단순히 태만에서 빚어진 사고.사건이라면 질책과 문책이 처방일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이 겪고 있는 큰 사건.사고가 모두 과속성장의 결과,즉 구조적인 요인에 의한 것임을 이제는 깨달을 때가 되었는데도 처방은 늘 이런 식의 말로 끝나고마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의 압축성장이 가져다준 것이 많으나 폐해도 그 못지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최소한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시대의 조급함과 밀어붙이기는 이 시절에도 변함이없다.영종도 신공항건설공사는 김포공항과의 역할분담 등 기본 운영전략도 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완공시기만 머리속에 있지 무계획적인 공사추진으로 인한 투자의 낭비나 뒷 날의 혼란 등은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고속철도 건설도 늘 걱정하는 것은 그저 예정했던 기일안에 완공하기가 어렵다는 것뿐이다.
이제는 속도주의에서 풀려나야 한다.개발시대의 시계는 버려야 한다.행정의 추진방식과 사고를 1백80도 바꿔야 한다.성장속도가 더디더라도 착실히 성장해 나가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득임을 경험할 만큼 경험한 이상 앞으로는 『천천히가 아름 답다』가 우리 사회.행정의 구호와 기본철학이 되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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