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합종연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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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국(帝國)의 시대가 지나면 전국(戰國)의 시대다.통합의 시대가 가면 분열의 혼란시대가 온다.일곱 나라가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인 게 중국의 전국시대다.이 중 한 나라가 크게 강해지자나머지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공동대처한 게 합 종책(合縱策)이다.강한 나라는 더욱 강해지려고 여섯 나라 연맹을 각개 격파식으로 깨고 하나씩 동맹을 맺은 게 연횡책(連衡策)이다.
미.소(美蘇)대립의 제국시대가 지나고 세계는 바야흐로 글로벌전국시대다.지역간 연대하고 국가간 합종하며 기업간 공동대처한다.경쟁과 공존이 기묘하게 합쳐야 살아남는 전국의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최근 반도체업계의 움직임이 돋보인다.세계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던 국내 반도체 3사가 공동보조를 취했다.D램반도체 분야에서의 과잉경쟁.과잉공급으로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자 3사 공동으로 감산(減産)을 했다.공멸(共滅) 아닌 공생( 共生)의 길을 택했다.이뿐 아니다.기존의 D램방식으로는 초고속정보화시대의반도체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한.미.일(韓美日)3국기업이 싱크링크니 램버스니 하는 초고속D램의 공동개발에 나섰다.21세기 생존전략을 위해 기업 간.국가간 벽을 허물고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도 결국 전국시대의 생존방식이다.너 죽지 않으면 나 죽는다식 제국의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공존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화해 공존은 없고 오로지 대결구도뿐이다.내가 살든지 네가 죽든지 양자택일의 원초적 싸움만벌어지고 있다.국회를 보라.여야간 세몰이 대치로 문 열자 휴업상태가 20여일째다.제도쇄신.법개정.규제완화 등 고쳐야 할 법,새로 정해야 할 법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건만 서로간 한치의양보도 없이 막무가내 개점휴업이다.국민의 대변자임을 포기하고 보스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정당 마피아의 졸개처럼 보인다.젊은 정치신인에게 표를 몰아 주고 새 정치,새 바람을 일으키라고그토록 간곡히 부탁했건만 어디서고 새 정치,새 바람의 냄새조차맡을 수 없다.
산업현장을 보라.공공부문노조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내걸고 파업불사를 결정한다.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세몰이작전으로 노총에 버금가는 민주노총 세력을 과시해 정부와 기업을궁지에 몰아 복수노조 허용을 쟁취하겠다는 것 이다.노사대결이란제 살 제가 깎아 먹는 꼴이다.대결 아닌 공생만이 노사가 살고기업이 사는 방식이다.근로자의 지식과 정보,기술과 기능의 수준을 어떻게 향상시키느냐에 노사가 한마음으로 연구하고 노력하는 것이 새 시대의 노사관계여야 할 텐데 우리의 산업현장은 적과 원수의 관계로 으르렁거릴 뿐이다.
국민의료를 책임진 한약사와 양약사간의 지루하고도 살벌한 싸움을 보라.양약과 한약간의 관계야말로 상호보완적이고 상승발전이 가능한 연대관계다.양약으로 풀 수 없는 한약의 동양적 신비,그신비를 현대과학으로 밝혀 내 저렴한 가격으로 제 공한다면 이야말로 상호보완적이다.양약을 좋아하는 국민이 있는가 하면 굳이 한약을 택하는 소비자도 있다.소비자가 선택할 일을 공급자끼리 서로의 밥그릇을 위해 사생결단 대결만 하고 있다.
나라의 장래를 책임진 최고교육기관인 대학을 보라.교육과 연구의 책임을 진 교수집단과 운영의 책임을 진 재단간에 총장선출을둘러싸고 서로 멱살을 잡고 있다.세계 1백위권에 드는 대학 하나 없는 연구 및 교육부재의 풍토에서 총장선출에 는 세계 최고의 과열 의욕을 보이고 있다.이제 21세기초면 부실대학은 문을닫을 수밖에 없을 만큼 공급과잉이 된다.교육과 경영에 합심해서정진해도 살아남기 어려운 시점인데 교육주체와 경영주체가 쌈질만하고 있으니 우리교육의 장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합종연횡은 혼란기 중국 전국시대의 생존방식만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합종연횡시대다.유럽이 뭉치고 북미주가 합쳐지며 아시아가 뭉치자고 외친다.먹고 먹히는 살벌한 지구촌 전국시대의 생존전략으로서 화합과 공존은 필수적 방어수단이고 공격무기다.세계가 공동세력을 규합하고 있는 판국에우리만 정치.산업.교육.보건 등 모든 분야에서 내부의 적끼리 나 혼자 살겠다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합종연횡의 공생의 길을 갈 것인지,아니면 서로 멱살을 잡고 끝내 공멸의 길을 걸을 것인지,지금 우리는 심각하게 선택해야 할 때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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