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회담 격식 허뭅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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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중국땅 선양(瀋陽) 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가 '국경' 도 없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땅입네다. "

물끄러미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내게 고려항공 여승무원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눈덮인 산야 사이의 강이 압록강이라고 했다. 갑자기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그냥 "우리 땅" 이라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려항공 여승무원과 대한민국의 장관이 스스럼없이 '우리' 였고, 압록강 너머의 땅은 남과 북이 따로 없는 '우리땅' 이었다. 나는 그녀가, '민족' 이라는 거창한 낱말을 쓰지 않고도 할 말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평양은 아직 겨울이었다. 널찍한 도로에 건물들은 한결같이 우람한데 거리의 사람들은 좁은 어깨를 하고 걸었다. 대동강변의 모란봉초대소에 짐을 풀고 창밖을 내다보니 얼어붙은 강의 한구석에 물줄기가 보였다. 막 해빙이 시작된 모양이다. 모란봉초대소의 강쪽 뜰에 부벽루가 서 있었고, 그 언덕 위가 을밀대였다.

첫날 강능수 문화상이 베푼 환영만찬 자리에서부터 그랬지만, 내게 아내 최명길과 '용의 눈물' 을 말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종종 서울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고, 평양 말씨도 다른 억센 사투리보다 오히려 전달력이 좋았다. 밤에 내 방의 전화로 집에 전화해 "평양" 이라고 했더니 아내가 몹시 놀라면서 왠지 조금 무섭다고 그랬다.

회담을 앞두고는 여러가지로 신경이 쓰였다. 분야별 남북 장관회담을 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첫 장관이라는 점도 부담이었다. 북측 관계자는 남측의 장관 하나에 북측의 장관급 인사들 여럿이 나서는 것은 모양새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평양에서 모두 일곱 차례의 회담을 했는데 딱딱하고 어색한 순간은 잠깐 뿐이었다. 마주앉은 송호경 북측 대표가 우리 대표단을 '귀측' 이라고 지칭하며 엄숙하게 기조연설문을 낭독하고 나서 내가 말했다. "남북회담은 꼭 이렇게 해야 되는 겁니까. 편하게 서로 생각들을 털어놓기로 하지요. " 그러자 宋대표가 털털 웃다가 "그럽시다" 라고 나왔다.

이번 방북 기간 중에 연 분야별 회담에서는 형식보다 내용 위주로 상당한 의견들을 주고받은 게 가장 큰 성과였다. 관광분야 회담에서, 나는 육로로 남북 연계관광이 실현될 때 남과 북 모두에게 얼마나 실익이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했고, 북의 대표단은 특별히 이 부분을 경청했다.

개성은 과연 우리 문화유물의 보고였다. 거리 곳곳이 그대로 고려의 유적지였다. 고려 성균관 박물관에 놓인 각양의 국보급 고려자기는 여전히 신비로웠고, 전통한옥 보존지역에서는 고려시대를 거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선죽교에는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소문대로, 다리 한쪽 바닥돌의 일부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다리 입구의 '善竹橋' 라는 글씨는 한석봉의 것이라고 했다. 기교가 철저하게 배제된 서체가 어찌나 담백한지 문득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던 이상(李箱) 의 명언이 떠올랐다.

북에 머무르는 동안 갑자기 이가 아파서 치과 치료를 받은 건 고마운 기억이고, 감기를 가지고 가서 거기에 남겨두고 온 건 미안한 일이다. 평양을 떠나올 때, 방북기간 내내 우리 일행을 보살펴준 강종훈 서기장이 그랬다. "봄이 제때 왔더라면 더 좋았겠는데요…. 평양기온이 예년보다 3~4도는 낮은 것 같습니다. "

봄 소식이 늦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봄의 용틀임이 대동강변 나뭇가지에 연초록 새싹으로 겨울을 비집고 솟아나고 있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누군들 '평양의 봄' 을 가로막을 수 있으랴.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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