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인상 후 한달 총수입 1만원 돼야 중산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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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 하루아침에 20배가 오른다? 모든 노동자들이 꿈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2002년 7월 1일(7·1조치) 북은 실제로 직종별 임금을 18∼20배 인상했다. 상품 가격도 그만큼 올랐지만 북 주민들은 이전보다 생활이 나아졌다고 말한다. 북의 주민들은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 알아보자.

한달 생활비로 얼마나 받습니까?
“현재 생활비로 5000원 정도를 받습니다. 과거에는 270원 정도를 받았죠.”

생활비는 현금으로 수령합니까?
“예, 매월 말 현금으로 봉투에 담아 줍니다.

생활비와 함께 물가도 많이 올랐는데, 생활이 나아졌습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임금체계 남쪽과 달라

지난해 12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북 농업과학원 소속 한 연구소장과 나눈 대화의 일부다.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이하 7·1조치)’ 이후 생활비가 18배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북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통상 ‘생활비’라고 부른다. 물론 생활비 체계는 남쪽과 상당히 다르다. 북의 생활비는 기본노임, 가급금, 상금 및 장려금으로 구성된다.

기본노임은 직종과 소속 산업부문, 노동부류에 따라 정액임금제와 도급임금제로 구분된다. 각각 공통적으로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차등화 돼 있다. 가급금은 기본노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속연한, 특수 노동조건, 기술자격 등이 고려돼 추가되는 임금이다.

상금은 국가가 특별히 설정한 일정한 지표를 달성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지급하는 추가 생활비로, 남쪽으로 치면 일종의 성과급(보너스)이다. 북은 계획을 초과 달성한 노동자에게 상금을 주어 근로의욕을 높이고 있다. 과거 탄광노동자들은 생산실적이 좋으면 상금을 500원까지 받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장려금은 노동의 양과 질, 설비, 이용률을 높여 생산을 정상화하면서 생산계획을 초과달성 했거나 자재를 합리적으로 이용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지불하는 추가적 생활비로, 일종의 포상금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신의주제2사범대학을 나온 묘향산 안내원의 경우 첫 해 생활비(=대졸 초봉)가 1700원 정도다. 여기에는 가급금이 추가된다. 이들은 3년에 한 번씩 승급시험을 보는데 급수가 올라갈 때마다 가급금이 늘어난다. 이들 안내원의 경우 기본노임과 가급금을 합쳐 최고 3000원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생활비는 원칙적으로 도급임금제의 적용을 받는다. 다만 노동정량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거나 노동의 결과를 수치적으로 평가하기 힘든 부문의 근로자는 정액임금제를 적용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무원들은 정액임금 노동자다. 물론 정액임금제에서도 작업한 노동시간과 기능, 기술, 자격정도에 따라 기본노임 액수가 다르다.

그러나 사무원 중에서 당 관료, 행정기관의 사무직 종사자의 경우에는 정액임금제의 적용을 받고, 기관·기업소의 관리자나 사무직의 경우는 소속 직장의 생산직 종사자의 도급임금에 준해 지급하는 도급임금제의 적용을 받는다.
독립채산제가 채택돼 있기 때문에 기관이나 기업소의 생산 및 판매실적에 따라 성과급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총 생활비가 차이가 되는 셈이다.

노동자와 사무원과 달리 협동농장 농장원들의 기본생활비는 연말에 협동농장별로 진행되는 결산분배에 따라 현물과 현금으로 지불 받는다. 그해의 작황과 판매실적으로 수익이 결정되는 남쪽과 비슷하다.
다만 국영농장 농장원은 일반노동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결산분배 대상에 해당되지 않고 국가로부터 매월 생활비를 받는다. 결산분배는 통상 추수와 탈곡이 끝나는 11월 이후에 실시된다.

분배 몫은 협동농장 총수입 중에서 국가납부 생산비를 공제한 다음 협동농장 자체 공동 축적기금과 각자 일년간 작업에 참여한 노력일 총수에 따라 분배된다.

사무직보다 생산직 임금 더 높아

북은 사회주의정권 수립 직후인 1949년 내각결정 제196호를 통해 생활비 기준을 정했는데, 일반적으로는 경노동보다는 중노동일수록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또한 대체로 사무직이 기술직보다 생활비 수준이 낮다. 이러한 원칙은 현재까지 유지된다.

그렇다면 북에서 생활비는 어떻게 책정되는 것일까?

북에서는 노동계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계획에 따라 직장 배치가 이루어지고, 생활비도 국가가 통일적으로 결정한 임금체계에 따라 지급을 받는다. 따라서 북에서 임금인상은 남쪽처럼 사업장별로 사용자와 협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특정한 시기에 통일적으로 실시한다.

북은 1970년과 76년, 92년에도 주민들의 생활비 인상을 발표했으며, 92년에는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 등의 생활비를 전반적으로 43.4% 인상했다.

북 당국은 이미 일찍부터 대충 일하고도 매월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과 똑같은 생활비를 받아 가는 이른바 ‘건달’들을 양산하는 ‘평균주의’적 분배에 대해 비판하며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이라는 분배의 원칙을 지키도록 각 공장과 기업소에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배의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국가가 생활비를 유일적으로 통제하고, 보수체계의 물질적 유인이 부족해 평균주의적 분배 관행이 쉽게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오랜 ‘평균주의’는 노동생산성의 저하와 생산목표의 차질을 초래했다. 또한 식량가격을 비롯한 전반적인 가격이 국가의 재정지출에 의해 실제의 가격보다 낮게 설정돼 있었다.
사회적 시책의 차원에서 국가의 부담으로 주민의 생활을 돌보았던 것이다.

재정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북 당국은 드디어 2002년 7월 1월 사회주의 경제관리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생활비를 대폭 인상했다.

이에 앞서 2001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분배와 관련해 “놀고 먹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며 근로자들의 생활을 안정, 향상시켜야 한다”라며 “노동량과 질이 높은 사람은 물질적 정치적으로 응당 평가를 받게 하며 분배에서 평균주의를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7·1조치’이전 북 노동자의 평균 생활비는 매월 80∼100원 정도였다. 그러나 ‘7·1조치’로 인상된 물가에 맞춰 근로자들의 생활비도 전면적으로 개정됐다.

북은 쌀을 구입하고 주택비를 지불하는 등 새로운 가격에 따라 근로자들이 생활을 꾸리는데 필요한 몫을 계산하고 생활비의 액수를 정했다. 노동자, 사무원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는 18∼20배 오른 평균 2000원 정도이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 고급 기능공, 과학자, 기술자들의 생활비는 더 높게 책정되었다. 특히 탄광, 광산을 비롯해 어렵고 힘든 부문에서 일하거나 국가의 전략물자들을 생산하는 근로자들 경우에는 생활비가 20∼25배 정도로 더 높게 책정됐다.

복지 혜택은 여전히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기사와 연구사, 설계원, 대학교원 등 전문가들의 생활비는 17배 정도로 책정됐다. 또한 사회적으로 과학기술중시 방침에 따라 새로운 과학기술로 경제발전에 공헌한 경우에는 그 가치에 따라 3년 동안 그 연구자와 연구집단, 해당 단위에게 자금을 지원케 했다.

농민도 과거에 노력일수에 따라 분배하던 것을 없애고, 농장에 나가 실제로 자신이 낸 성과물에 따라 분배평가를 받게 됐다. 또한 농업생산을 빨리 늘리기 위해 국영농장의 농민들의 한 달 생활비는 평균 2300원 정도로 노동자, 사무원들보다 더 높게 책정됐다.

군인의 생활비는 ‘선군시대’의 요구와 사기 진작의 필요성에 의해 25배∼31배까지 가장 큰 폭으로 인상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각 기업에서는 업종별, 기술자들의 자격 급수별 생활비 기준을 다시 정하고, 번 수입 안에서 노동 정량과 작업과제 수행 정도에 따라 생활비를 계산해 지급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생활비가 대폭 인상되면서 더 이상 생활에서 ‘공짜’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됐다.
그 동안 북 주민들은 생활의 전반을 국가에 의존하였지만 이제 ‘7·1조치’ 이후 자신이 번 돈으로 식량부터 모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써야 하게 됐다.

과거 북 주민들은 생활비 외에도 국가 보조금 지불형태로 교육, 주택, 의료, 식량 등에서 막대한 액수를 추가로 제공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은 “노동자들은 먹고, 입고, 집을 쓰고 사는데서만 한해 동안에 매 세대에서 1300∼1500원의 추가적 혜택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월 평균 100∼125원에 해당되는 엄청난 돈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평균 생활비보다 더 많은 액수의 추가 비용을 국가가 부담했던 것이다. ‘7·1조치’로 이 추가비용이 대폭 축소됐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근로자들의 실질 생계비에서 식량값이 차지하는 몫이 불과 3.5%밖에 되지 않았다면, 이제 식량값이 차지하는 몫은 50% 정도가 됐다. 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많은 성과를 내어야만 하게 됐다.

그렇다고 국가의 복지혜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7·1조치’ 이후에도 무상 치료제, 무료 의무교육제, 사회보장제, 영예군인 우대제 등의 사회적 시책들은 계속 실시되고, 오히려 연금이나 생활보조금은 인상됐다.

또한 고아나 가족이 없는 노인들을 데려다 부양하는 세대들은 부양자 1명당 매달 300원 정도의 보조금을 더 받고, 아이들만 사는 세대, 자식 없이 노인들만 세대, 부부가 모두 아파서 일할 수 없고 아이들만 있는 세대에는 가족 1명당 한 달에 600원 정도의 생활보조금을 받게 됐다.

농민들, 사무직 50배까지 받기도

눈에 띄는 현상은 ‘7·1조치’이후 생활비가 인상되고, ‘일한 만큼, 번 만큼’의 실적제가 강화되면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본노임 이외의 수입을 올리는 층이 나타난 것이다.

북에서는 “노동자들의 일 욕심이 늘어났다”라고 표현했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해 “경제활동에서 평균주의를 퇴치한 이번 조치가 생산의욕을 높였다”라며 “탄부들은 내각의 상(장관급)보다 높은 6천원의 생활비(= 기본노임)가 설정됐지만 실제로는 석탄의 증산으로 매달 수만 원씩의 돈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북의 대표적인 협동농장인 청산리협동농장은 정보당 67톤의 벼를 생산하던 논에서 100톤 이상을 생산해 일부 농민들은 10만 원 수준의 분배수입을 올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 당국은 농민들이 생산한 벼를 1㎏당 29원(쌀은 40원)에 수매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쌀 1톤을 더 생산하면 2만 9000원을 더 분배받을 수 있다.

자기가 받은 생활비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북의 주민들의 사고도 누구나 ‘실리’를 자기 생활과 결부해 생각하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활비와 가격이 인상되면서 북 ‘중산층’의 수입도 변화했다. 북에서는 대체로 한 가정의 수입이 8000∼1만 2000원 정도는 돼야 안정적으로 가정경제를 꾸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조선신보》에 평양 중산층 가정으로 소개된 최세화(평양시 인민위원회 도시경영국) 부국장 집의 경우 최 부국장 부부와 딸 둘이 모두 직장생활을 해 총 수입이 1만 원 정도인 것으로 소개됐다.
북의 공식환율(1달러당 143원)로 따지면 약 70달러에 해당한다. 물론 여기에는 교육, 의료, 육아, 연금 등의 사회적 혜택은 제외돼 있다.

또 생활비가 오르면서 식량, 기초 생필품 등을 구입할 수 있는 구매력도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2년과 2003년의 여름, 평양거리의 모습을 비교했을 때 거리의 상점을 찾는 주민들의 수가 뚜렷하게 늘어난 것을 평양 방문 기간에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의 각 구역마다 2개씩 시장이 형성된 것도 주민들의 구매력이 상승한 증거다.

같은 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지만 남쪽에서 능력별 연봉제가 확산되면서 같은 기수의 근로자들 사이에서 임금 차이가 발생하듯이, 북쪽에서도 ‘번 수입’이 강조되면서 과거와 달리 같은 직업, 같은 급수의 동료들 사이에서 생활비 차이가 늘어날 것 같다.
정창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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