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외교의겉과속>下.비공식채널로 美여론 파고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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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은 미국을 「원쑤(怨讐)」니 「승냥이」니 하면서 거칠게 비난하면서도 대미(對美)관계개선의 불가피성을 인식,80년대 후반부터 사전정지작업을 해 미국내 유력인사와의 접촉을 통해 얼굴을 익히고 정보를 암암리에 축적했다.김영남.김용순 .황장엽등 노령인 이들 외교수뇌부를 대신한 부부장급 신예들은 특히 미국관리들을 접촉하기보다는 미국의 여론주도층으로 정책결정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계.재계인사들을 폭넓게 만나면서 저변을 확대해 나가는 전략을 택했다.이 작업의 본거지는 당시 옵서버자격으로 미국 뉴욕에 진출해 있던 유엔주재 대표부.
대표부 요원중에서도 직접 뛴 인물은 허종 부대사와 한성열 공사.이들은 지난 88년 뉴욕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한비공개 정기세미나등에서 남한외교관들과 마주 앉기도 했다.한국측에서는 당시 공노명(孔魯明)뉴욕총영사를 비롯,총 영사관과 유엔대표부의 참사관급 인사들이 주로 참석했다.이때만 해도 許의 영어는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그러나 3년후에는 전혀 달랐다.91년 9월 강석주외교부 부부장과 컬럼비아대에 들른 許는 영어를 꽤 한다는 강석주가 이따금 통역을 의 존할 정도였다.許는 깔끔한 영어실력을 과시했다.개인적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미국인들과의 접촉이 잦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뉴욕주재 북한외교관들이뉴욕을 벗어나려면 미 국무부의 특별허가를 얻어야한다.미국과 북한간에 국교가 없기 때문 .그러나 許는 북한외교관을 연사및 토론자로 초청하려는 수많은 미국의 학교.연구소가 국무부에서 받아낸 허가장을 가지고 미국전역을 누볐다.경수로회담등에 얼굴을 내비치는 그는 평양에서 북한의 대미정책입안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다. 아직도 뉴욕 대표부에 근무하는 한성열은 주로 재계인사들과의 접촉을 넓히는 중이다.그 결과 많은 미국 기업인들과 두터운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韓이 재계인사들과 맺은 친분은 북.미 경수로 협상에 십분 활용됐다.「원자로 가동중지 」라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부닥쳐 협상이 난항을 겪고있을 때 미국의 한 실업가가 韓에게 경수로가 완공될 때까지 대체에너지로 중유를받으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일러줬다.韓은 즉시 이를 평양에 보고한뒤 제네바로 달려갔고,미국인 실업가 는 워싱턴 관가의 대학동창들에게 이 대안을 귀띔했다.결국 한성열공사가 닦은 미국내 물밑작업은 북.미간 경수로및 중유제공이라는 합의를 이루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북한의 대미 경제외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김정우(金正宇).그의 현 직책은 정무원 산하 대외경제위원회의 부위원장과 대외경제협력위원장.金의 역할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 기업들의 대북투자에 대한 북한측 창구역할.특히 나진.선봉지 구에 대한 투자유치작업을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원만한 성격과 신사다운행동으로 많은 미국인들의 호감을 사고있다.남한의 4.11총선 직후 세미나참석차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학자들에게 『우리가 정말 여당을 도와준 거냐』고 농 담을 던져 참석자들의 폭소를 자아내는등 유머감각도 갖춘 인물.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이종혁(李種革)의 활약도 만만치 않다.
정확한 직책은 확인되지 않지만 노동당 부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다니면서 학술회의등에 참석,북한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친북(親北)여론을 형성하는데 애쓰고 있다.논리가 정 연하고 상대방을 끄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이다.
외교부에서 미국을 담당하는 제16국의 책임자 이형철도 북한의대미외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인물.
대미정책을 입안하는 실무책임자로 국제무대에 가끔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하지만 미국에서 개최되는 세미나등 특정행사에 참석하겠다는 통 보를 일찌감치 해놓고도 행사 며칠전 돌연 취소하기도해 약속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당.정 엘리트를 포함한 적지않은 외교실세들이공식외교활동뿐 아니라 학술회의 참석과 같은 비공식 활동을 통해미국내에서 북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작업에 나서고 있다.일각에서는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이후 이들이 닦 은 기반이 친북세력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79년 중.미 관계정상화 이후 중국 및 대만정부가 워싱턴정가에서 벌였던 첨예한 외교전까지는 아니라도 남북한간의 간단찮은 외교전 가능성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관측이다.
김용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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