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프리즘>강수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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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이명세 감독의 영화 『지독한 사랑』에 출연하면서 강수연은 머리를 잘랐다.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삭발 출연한 이후 6년간 곱게 길러온 신체의 한 부분을 잘라낸 것이다.극중 배역에 맞춰 배우가 헤어 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큰 얘 깃거리가 아니다.이번에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른 것도 깔끔하고 지적인 문화부 여기자의 캐릭터를 연출하기 위해 흔히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그러나 이번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강수연이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우선 세계 3대 영화제 안에 꼽히는 베니스영화제에서의여우주연상 수상이란 공인된 물증이 있다.현장에서 함께 일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프로 근성과 연기 재능에 대 해 이구동성이다.여기에 마음만 먹으면 1년에 10억원 가까이 챙길 수 있는광고를 거의 하지않는 자존심이 대중들의 정서적 동조까지 얻어내고 있다.한마디로 그는 연기 경력이나 연기의 질,그리고 배우로서의 자세까지 따져봐도 「월드 스타 」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강수연에게 이런 꼬리표가 붙어다녔다.『어떤 연기를 하더라도 강수연식으로 한다.』『창녀든,수녀든,혹은 가정주부든 결국은 강수연이다.』 이말은 배우로서의 강렬한 개성을 칭찬하는 동시에 실제 강수연의 캐릭터가 영화에 녹아들지 않고 터져나오는 점을 경계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과감히드러내고 열정적으로 몰입하는데는 따를 자가 없지만 안으로 파묻고 아끼고 머뭇거리는 몸 짓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그녀는 이모습이 자신의 실생활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표현을 직설적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게 저예요.싫은 것은 얼굴에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감출 생각도안해요.원래 성격이 강해서 그런지 연기해놓고 보면 어느 샌가 평소의 내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걸 느껴요.』 겉으로 내지르는 연기보다 안으로 품는 연기가 좋은 연기라고 생각해온 그녀에게 이 부분은 밀린 숙제였다.『지독한 사랑』이 그녀에게 각별한의미를 갖는 것도 이때문이다.그녀가 맡은 극중 배역 영희는 여성스럽고 귀여운 여자다.그녀의 표 현을 빌리면 『드세고 격렬한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이번엔 문화부기자 강수연이 아닌 문화부기자 영희를 온전하게 살려봐야지 라고 그녀는 다짐했다.
『동작선도 많이 약화시키고 목소리 톤도 낮췄어요.전체적인 이미지를 순화시켜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 녀의 생각은 대체로 의도대로 맞아떨어졌다.시사회장을 나가며 몇몇 기자들은 『강수연의 가장 귀여운 모습을 본다』고 했다.자신의 연기력을 과시하듯 영화적 흐름보다 한 박자 더 나가던 특유의 몸짓이 여기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오랫동안 길러온 머리를 자르면서 그녀는 자신의 연기에 끊임없이 오버랩되던 실제의 자기 모습을 완전히 떼어 내버린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번 작품은 25년을 이어온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전환점이 될 만하다.그래서 『지독한 사랑』을 본 개인적인소감을 넌지시 물어봤다.『제가 잘 봐서 뭣해요.관객들이 잘 봐야죠.』그녀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면서도 이번 영화 의 결과에만족하는 인상을 줬다.늘 자신에 대한 얘기를 직설적으로 하는 강수연의 어법이 아니어서 궁금증이 생겼다.연기와 삶을 동일시해온 그녀에게 살아가는 태도에도 어떤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섯살 때부터 연기를 했는데 연기와 삶이 혼동되면서 받는 괴로움 같은 것은 없나.
『연기를 안하고 보낸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실제생활과 비교가 안된다.어떤 때는 연기가 실제같기도 하고 생활이 연기같기도 하다.촬영 끝낼 때마다 심하게 우울증을 앓는데 배역과 헤어지는게애인과 이별하는 기분이 든다.』 -현실에서 사랑을 구하면 그런식으로 이별하지 않아도 될 것같은데….
『어릴 때부터 개인생활이 없어서 이성에 대한 환상이 컸다.그리고 그걸 곧바로 결혼으로 연결시켰다.20대 초반에 청혼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지금쯤 아줌마가 돼 있었을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환상과 꿈이 너무 컸다는 생각이 든다.그래도 여전히 이번 영화같은 격렬한 사랑을 꿈꾸고 있다.기복이 심한 감정을 받아줄수 있는 따뜻하고 자상한 남자였으면 좋겠다.그러나 결혼으로 이어져야 된다는 환상은 없어졌다.결혼은 마흔살쯤에나 할 것같다.
』 -촬영이 없을 때 뭘 하며 지내는지 상상이 잘 안된다.
『주로 혼자 지낸다.어떤 때는 1주일씩 집에 틀어박혀 있다.
책을 보거나 비디오를 보지 않으면 공상하며 보낸다.관념속에서는백번도 넘게 연애했다.가끔씩 친구를 만나 술마시는데 한번 마시면 많이 마신다.』 ***배 우를 안했으면 뭘했을 것같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밥 벌어 먹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자신의 꿈과 환상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기 때문에 영화를 하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한다.『하기 싫은 것 안하고 하고 싶고 잘하는 것만 하고 사는 게 꿈』이라는 엄청난욕망을 그녀는 편하게 말한다.
행동도 그만큼 스스럼없다.그녀는 예상했던 인터뷰 시간보다 30분 늦게 나타나 30분 일찍 떠났다.일견 오만해 보이는 이런행동도 거침없이 솔직한 캐릭터가 면죄부를 가져다주는 게 그의 매력이란 인상을 준다.1백20%를 드러내다 80 %를 지향하는연기의 변화가 그의 삶으로 이어질지는 오리무중이다.아무리 정교한 그물을 쳐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알수 없는 여자.이런 모습이 배우가 아닐까.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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