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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 시시각각

위기설(說)엔 ‘위기’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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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9월 1일(월요일) 한국 금융시장은 말 그대로 ‘블랙 먼데이’였다. 주가가 폭락하고 금리와 환율은 치솟았다. 말이 씨가 됐는지 시중에 떠돌던 이른바 ‘9월 위기설’이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 9월의 첫날부터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1987년 10월 19일도 월요일이었다. 미국 뉴욕 증권시장에선 개장 초부터 대량의 ‘팔자’ 주문이 쏟아지면서 주가가 하루 동안 508포인트, 전일보다 22.6%나 떨어졌다. 하루 하락폭으론 대공황의 시발점이 된 1929년 10월 24일(이날은 목요일이었다)보다 더 큰 폭락 장세였다. 투자자들 입장에선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별다른 악재도 없어 도대체 왜 그런 폭락 장세가 벌어졌는지 영문도 몰랐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기관투자가들의 프로그램 매도가 연쇄적인 매도를 불러 주가 하락을 걷잡을 수 없이 증폭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9월 1일 서울 금융시장의 블랙 먼데이에서도 뚜렷한 악재가 보이지 않았다. 경제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일이고, 외국인의 매도 역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증시에선 이미 알려진 악재는 더 이상 악재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오히려 이날 발표된 대규모 감세안이 호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심리적인 저지선이라는 것이 한번 무너지자 시장은 곧바로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투매가 투매를 불렀고, 9월 위기설은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되어가고 있었다.

위기설은 정녕 위기를 부르고야 말 것인가. 9월 위기설의 위기는 단순히 주가가 폭락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97년 외환위기 같은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쓸 수 있는 외환보유액이 바닥나 외채를 갚지 못하는 사태가 다시 온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국 경제가 또다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란 불길한 예언이다. 정부는 이 같은 예언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명한다. 외화유동성이 부족해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조목조목 반박한다. 또 작금의 경제상황이 결코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단박에 고꾸라질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왜 위기설은 가라앉지 않는 것일까.

나는 정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의 행태가 시장에 신뢰감을 주지 못했기에 근거 없는 위기설에 흔들리고, 정부가 뭐라 해명해도 믿질 않는 것이다. 9월 위기설의 진행 패턴을 보면 광우병 괴담의 확산 과정과 놀랍도록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환율정책에서 드러난 일관성의 결여가 시장의 불신을 낳고, 그 불신이 위기설의 불씨가 되어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발전했다. 여기다 한국 금융시장에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일부 외국계 언론이 여과 없이 흘려보낸 위기설이 다시 국내에 들어와 확실한 위기의 징후로 둔갑한 것이다.

 사실 위기설이 나돈 후에 실제로 위기가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붕어빵엔 붕어가 없듯 위기설엔 위기가 없다. 위기는 위기인 줄 모를 때 어느 날 느닷없이 닥치는 법이다. 97년 외환위기 직전 위기를 감지한 정부 당국자나 금융전문가, 언론은 없었다. 위기가 막상 벌어지고 나서야 위기인 줄 알았다. 위기를 코앞에 두고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은 문제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국 대공황 직전까지도 정부 당국자와 은행가, 증권전문가, 학자들은 미국 경제의 호황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현재 우리 경제가 위기”라고 말한 것은 진짜 위기를 사전에 막겠다는 예방적 위기론이다.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경각심이다. 이런 위기의식마저 없을 때 정말 위기가 온다.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 파동과 촛불집회의 위기를 넘지 못했다면 지금쯤 진짜 위기를 맞았을지 모른다. 9월 위기설의 시점은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의심이 든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위기설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다시는 위기설이 나오지 않도록 묵묵히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