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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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지난 월요일 저녁 제법 굵은 비가 내리는 중에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내 용극장을 향했다.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있다 해서 몇 주 전부터 벼른 발걸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이즈음 같은 장소에서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을 접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타고 넘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기 때문이다. 본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라는 칼럼(2007년 8월 25일자)을 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일 년 만에 다시 접한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는 지휘를 맡은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아들인 올해 스물네 살의 정민씨가 함께 땀흘리며 공들인 탓인지 한층 소리가 숙성했다. 저마다의 삶의 곡절로 남들처럼 부모가 해주는 밥을 먹지 못하고 자란 그들이 울려내는 화음은 그 자체로 벅찬 감동이었다.

# 어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페스티벌 대극장에서는 구스타보 두다멜이 이끄는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있었다. 잘츠부르크 음악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였던 이날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될 만큼 주목받는 콘서트였다. 이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두다멜은 올해 스물일곱 살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로 급부상한 LA필하모닉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내정된 지 오래다.

# 두다멜은 베네수엘라의 저소득층 청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El Sistema)’ 출신이다. 1975년 아마추어 오르가니스트 겸 지휘자였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마약과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던 극빈층 청소년의 삶을 붙들기 위해 허름한 차고에서 11명의 학생에게 악기를 쥐여준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후 로린 마젤·사이먼 래틀 등의 유명 음악인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고 베네수엘라 정부가 연간 2900만 달러의 적극적인 자금 지원을 한 덕분에 4세부터 20세 즈음까지의 어린이·청소년 25만 명이 하루 평균 4시간씩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이 빈민가 출신이었고 청소년보호감호소에 수감 중인 아이도 적잖았다. 그렇게 엘 시스테마의 역사는 시작됐다.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경은 엘 시스테마를 가리켜 “기적이며 음악의 미래”라고 말한다. 10여 년 전부터 엘 시스테마에 관여해온 지휘자 곽승씨는 “부잣집 아이만 음악을 배우는 게 아니다. 거기에 가면 진짜 열정과 음악 할 마음이 다시 생긴다”고 말했다.

# 우리나라에도 건국대가 서울시 위탁을 받아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 중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는 건국음악영재아카데미가 있다. 지난 여름 동안 방학 집중 프로그램을 통해 60여 명의 아이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가정형편상 제대로 된 레슨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아이들이 이곳에서 ‘미래의 모차르트’ ‘내일의 베토벤’이 되는 꿈을 꿨다. 하지만 꼭 대가를 키워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소외되고 그늘진 곳의 아이들이 악기를 다루며 희망의 날개를 펼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 낡고 물려받은 악기라도 좋다. 그들 손에 쥐여주자.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한 이들이 음악의 힘으로 스스로를 다시 세워나갈 수 있도록 한국판 엘 시스테마를 만들자. 그들이 꿈을 향해 날 수 있게 날개를 달아주자. 정부도 나서고, 기업도 나서자. 음악인들도 스스로 낮은 자세로 함께하자. 음악에는 감동의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만드는 힘이다. 우리의 미래는 결국 사람에 달렸다. 한국판 엘 시스테마가 그 미래를 살지게 할 것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