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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칼럼>사정 대 개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백원구(白源九)증권감독원장을 구속한 것은 직위를 이용한 수뢰혐의 때문이라고 검찰은 발표했다.이 발표를 늘이지도 구부리지도않고 그대로 믿는 사람 숫자는 의외로 적은듯 하다.늘이는 사람의 대표적 의견은 대규모 사정(司正)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것이다.구부리는 사람은 백원구씨가 반(反)PK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조합(組合)도 있다.늘여서 구부리는 조합은 대통령이 사정의 「칼그물」을 펴는 판에 반PK가 걸렸다고 푼다.순열(順列)도 있다.순열이란 조합에 순서를 붙인 것이다.구부려서 늘이는 순열은 반PK를 잡으려고 사정을 다시 시작한 것이라고 푼다.백성의 말은 그 수사학적 수준은 나무랄 수 있어도 그 내용을 정치 지도자가 질책할 수는 없다.백성이 공공 조처에 관련해 의혹에 빠져 틀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원천적으로 정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증권감독원장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겨우 단돈 1억몇천만원 먹었다고 잡아가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말한다.잡아가둘 구실을 만들려고 두들겨서 먼지를 털었다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어딨어!」먼지 냄새보다 더 케케묵은냄새가 나는 말이다.이 말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정치의 참담한 실패를 증거한다.높은 지위일수록 먼지가 더 많이 나야 잡아갈 조건이 성립된다는 백성의 인식도 정치의 실패다.공직자가 부정하게 챙긴 돈 1억몇천만원을 먼지 라고 백성이 여기는 것도 정치의 실패다.인식체계의 총체적인 혼란이다.이런 금액은 먼지가아니라 바위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어딨어」라는 말이 내포하는 것 같이 모든 공직자가 털면 몸에서 먼지,아니 바위가 쏟아질 지경이면 개별적 사정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총체적 개혁(改革)이라야 한다.
개혁은 개인 개인선에서가 아니라 잘못된 헌 시스템을 고치거나폐기하고 필요한 새 시스템을 건설하는 것이다.사정은 쉽다.그러나 개혁은 어렵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취임후 개혁과 사정을똑같이 강조했으나 불행하게도 백성은 그가 사정 하는 것은 많이보았지만 개혁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는듯 하다.제도를 개혁해야 할 곳에서 개인을 사정하고만 있으면 그것은 본래 의도야 어디 있었든 결과적으로는 불가불 사정을 위한 사정, 즉겁주기 위한 사정, 아니면 표적 사정이 되고 만다.백원구씨를 잡아가둔 일을 두고 백성이 그 이유를 늘이고 구부려 보는 것,또 그렇게 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다 이때문이다.
개혁해야 할 초점은 무엇인가.그것은 권력의 독점과 남용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법률의 엄격한 규제를 벗어난 권력,법률이 정한 바 보다 재량권의 범위가 더 넓은 권력을 우리는 폭력이라 부른다.군인 출신 아닌 사람을 백성이 직접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뽑더라도 권력의 독점과 남용이 있는 한 그것은 민주주의도,문민정부도 아니다.
이른바 「규제완화」조처가 거의 전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이유도규제완화를 했다고 펴보인 손이 실은 남용할 수 있는 독점적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권력없는 사람을 위해규제완화의 단비를 뿌리려면 권력자에게는 규제강 화라는 얼음을 얼려야 한다.
우리나라의 증권감독원장은 증권관리위원회 위원장도 겸한다.이 사람이 가진 증권시장 감독권 안에는 상장 허가,내부자 거래 조사,주가조작 감시,M&A(매수합병)감독 등이 포함된다.
예컨대 지금 공개 자격을 갖춘 기업으로서 줄을 서서 기업공개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업체수는 2백개가 넘는다.이렇게 대기행렬이 길게 된 까닭은 「주식 공급 물량이 많아지면 주가가 내린다」「증권 당국이 주가가 내리도록 방치해서는 안된 다」라는 몽매하고도 반시장적인 해석 때문이다.공황(恐慌)적 상황에 대한 응급 조처도 아닌 판에 재정경제원과 증감원이 장기적으로 주가를 이런 식으로 조작(操作.造作)하고 있는 것은 주식 투자자의 기득권을 보호하기보다 시장과 규정을 능 가하는 재량권의 위광(威光)을 과시하기 위해 세금과 금융자금을 낭비하는 행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갈치를 늘어 놓고 파리 안 오기를 바라는 것이차라리 낫지,이렇게 증권시장을 운영하면서도 부패를 피할 방법은없다. 퇴근후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말한다.『증감원장이 경북고 출신에서 경남고 출신으로 바뀌었더군.』이 말은 사정으로는 나라를 더 꼬이게 할뿐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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