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년 - 신영복 교수와의 대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누군가는 그를 한국 현대지성사의 ‘지연된 축복’이라고 표현했다. 무기수 신영복(67·성공회대 석좌교수)이 20년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함께 세상으로 나온 지 어느새 20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구형받았던 스물일곱의 청년 장교(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 강사로 군 복무 중이었다)가 40대의 중년이 돼 당시 세상에 던진 말은 감금의 세월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를 가둔 세상이 놀랐다. 출소 20년을 맞은 신 교수를 28일 오전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 근처 찻집에서 만났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출간 20년을 맞았다. 20년간 50만부 넘게 꾸준히 팔리고 있다. 팬클럽은 이 책 제목을 줄여 『감·사』라고 부르던데.

“독자들의 20년 사랑에 감사 드릴뿐 아니라 내 수형생활 20년에도 ‘감사’한다. 감옥은 내게 커다란 학교였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됐다지만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모든 사회성·역사성이 응축된 공간이 감옥이었다.”

-출소 20년이 지났다. 이를 ‘해배(解配·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는 의미) 2기’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한국 사회의 변화는 어땠나.

“내가 풀려난 88년은 6·10 민주화 운동이 만든 ‘87년 체제’의 시작이었다. 10년 뒤 외환위기로 인한 ‘97년 체제’가 왔다. 지금은 이명박 정부가 탄생한 ‘07년 체제’의 시작이다. 감옥 속 20년보다 세상에서의 20년이 더 폭넓고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사회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많다. 국가권력의 변화를 중심으로 볼 수도 있고 시민사회의 장기적 변화를 기준 삼을 수도 있다. 87년의 민주화 운동은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했다. 이명박 정부도 보수세력의 국가권력 재장악을 목표로 해서 탄생했다. 동일한 패러다임이다. 국가권력을 강력하게 장악했던 파시즘과 프롤레타리아 정권도 결국 사회 변혁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권력의 장악보다 과정 자체를 인간적·민주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민주화의 87년 체제가 막을 내렸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명박 정부에 대해 수구파로의 정권 회귀, 역사의 퇴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역사는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다른 한쪽이 절멸되기를 바라는 식의 정치나 운동은 안 된다. 한국 사회의 좌파-우파 논쟁은 극단적이고 비생산적인 담론 구조다. 냉전으로 비롯된 불행한 현대사 때문이기도 하다. 좌우 논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좌파 명품’이라는 견해가 있다. 좌파가 그 사회를 발전적으로 추동 한다는 신뢰가 형성돼 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 세력이 가졌던 안이한 전망을 반성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지난 20년 간 급격한 변화에는 내적 요인뿐 아니라 세계화라는 외적 요인도 컸다.

“우리는 부존자원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뛰어난 인적 자원을 가졌다. 세계에 대한 개방적인 지향성을 닫을 수 없는 구조다.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의 토대가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물결에 대단히 취약하다. 내수에 기반한 중소기업과 중산층이 튼튼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야 경제 성장이 고용·복지 성장으로 연동된다. 대기업 중심의 세계화는 국내 연관 효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촛불시위에서 ‘새로운 운동방식의 전형’을 보았다고 평가했는데.

“세계 사상사를 뒤흔든 프랑스 68혁명도 그 시작은 사소한 문제 때문이었다. 대학가에서 남·녀 기숙사 배치 문제로 인한 학내 소요에서 비롯돼 교육문제, 체제 문제로까지 번지며 유럽을 뒤흔들었다. 사태 초기 프랑스 공산당이나 노조도 학생들의 시위를 ‘철없는 행동’으로 규정했다. 변화된 젊은이들의 정서를 좌파든 우파든 기존 세대가 읽지 못했다. 촛불시위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변화다. 한국사회의 보수가 최근 6개월 간의 변화를 성찰적으로 소화하길 바란다.”

-최근 사회적 신뢰 구축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정치권·재계·노조·시민단체·언론 등 누구도 신뢰 받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주역을 세 마디로 요약하면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이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것이다. 변화와 소통이 지속적 생명력의 근원이란 말이다. 소통이 지속적으로 가능 하려면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소통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이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40년 전 통일혁명당 사건 당시의 북한과 지금의 북한은 어떤가.

“통일(統一)을 말할 때 ‘거느닐 통(統)’ 대신 ‘통할 통(通)’으로 바꿔 ‘통일(通 一)’이라고 쓰곤 한다. 통합보다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상호 간에 교류 협력, 평화 정착만 이뤄지면 통일로 가는 모든 과정의 90%는 달성된다. 통일보다 평화 정착이 먼저다. 평화적 공존이라는 형태로 내부 소모를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애국주의·중화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21세기의 패러다임을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글·사진=배노필 기자

◇신영복 교수는=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88년 출소 직전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50만부 이상 팔리며 우리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중앙일보에 2년 여 연재한 글을 모은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1998)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저술 뿐 아니라 한글 서예에서도 독자적 경지를 이뤘다.



소극장 가득메운 출간기념회

20대부터 백발 노인까지
20년‘감사’ 팬들 함께해

27일 오후 7시.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지하 1층 소극장 230여 석이 가득 찼다. 주최 측이 70여 개의 보조석을 마련했지만 행사장을 늦게 찾은 이들은 극장 계단에 앉거나 서서 신 교수의 ‘북 콘서트’를 지켜봤다. 이날 행사의 정식 명칭은 ‘『감사(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주년, 『청구회 추억』 출간 기념회’(사진).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도 한동안 서서 행사를 지켜봤고 소리꾼 장사익씨는 내내 서서 함께 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보조의자에 쪼그리고 앉았다. 20대 학생들,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와 백발의 노인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같은 공간에서 신 교수의 출소 20년을 기념했다. 신 교수의 감옥살이 20년을 20년 간 읽어 온 독자와의 자리였다. 신 교수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수감 되기 직전까지 이어진 ‘청구회’는 그에게 애틋한 소재다. 교도소에서 ‘똥종이’로 쓰는 벌건 재생용지 20여 장에 빼곡히 기록한 그의 소설 같은 이야기다. 1966년 봄, 당시 숙명여대에서 강의를 하던 신 교수는 서울대 문학회 후배들과 서오릉으로 야유회를 간다. 그는 이날 우연히 만난 ‘문화동(지금의 서울 중구 신당동) 아이들’ 여섯 명과 2년 가까이 동화 같은 인연을 맺는다. 문화동 달동네의 가난한 아이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부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 ‘국민학교 7, 8학년들’에게 그는 손을 내밀었다. 청구국민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라 모임 이름을 ‘청구회’라 지어주고 매월 마지막 토요일 모임을 갖는다. 68년 여름 신 교수의 구속으로 이들과의 인연은 끝이 난다. 그는 사형수의 신분으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이 청구회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는 수사 중에 ‘청구회’란 ‘불온단체’의 성격과 조직원을 대라는 희비극적인 심문을 받기도 한다.

88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발간 때는 이 글이 실리지 못했다. 뒤늦게 원고를 발견해 98년부터 증보판에 실었다. 이번에 나온 『청구회 추억』은 조병은 성공회대 교수의 영문번역과 김세현 화백의 그림으로 새로 단장한 단행본이다.

글=배노필 기자, 사진=뉴시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