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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화 “난 북한 보위부 소속이다” 중위 알고도 신고 안 해 … “사랑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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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탈북 위장 간첩혐의로 구속된 원정화(34)의 주 활동대상이 군 장교들이라는 점이 밝혀지자 군 당국은 충격에 빠졌다. 영관급 장교를 포함해 모두 7명의 장병이 여간첩에게 정보를 넘기거나 포섭·접촉 대상이었다는 게 군 보안과 방첩을 맡고 있는 국군기무사령부의 설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맡고 있는 정훈장교이거나 대북정보를 담당하는 이들이었다. 군을 대상으로 한 간첩침투가 밝혀진 것은 1986년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가 군 장교로 임용됐던 사건 이후 22년 만이다.

무엇보다 문제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일부이긴 하지만 극도로 해이해진 군 장교들의 정신상태다. 원정화와 함께 구속된 황모 중위(26·내년 대위 진급 예정)는 2006년 11월 대대급 부대 정훈장교로 근무하다 안보강연을 온 원정화에게 끌려 교제를 시작했다. 특히 황 중위는 지난해 10월 원정화가 “나는 북한 보위부 소속 공작원이며 내 임무는 군 간부를 포섭하는 것”이라고 밝혔는데도 신고하기는 커녕 활동을 도왔다. 기무사는 “황 중위가 원정화와 함께 소각할 팩스자료나 문서를 은밀히 소각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 “황 중위는 자신이 ‘원정화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허술한 군 보안교육 강사 선정과정과 부대 출입 문제도 간첩활동을 막지 못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원정화는 2006년 11월부터 무려 52차례나 일선 군부대를 돌며 강연을 벌였다. 이를 통해 장병들에게 북한 가요를 들려 주고 체제 찬양 CD를 상영하며 “6·25 전쟁은 미국과 일본 때문”이라거나 “북한 핵은 체제 보장용”이라는 등의 북한 주장을 선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올 3월 원정화가 중국 내 북한 영사관에 들렀다는 중국 내 협조자의 결정적 정보제공이 있기 전까지 원정화는 활개를 쳤다. 조선족으로 위장해 국내에 들어와 탈북자라며 자수하는 등 행적에 의심이 가는 점이 있었지만 보안교육 강사로 추천돼 군 당국의 신원조사까지 통과한 점도 군의 보안시스템이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지적을 낳는다.

수원지검 공안부는 27일 탈북자로 위장해 간첩 활동을 벌인 원정화의 공작 활동 내용이 담긴 증거물을 공개했다. 공안부 직원이 원정화와 가족 사진이 들어 있는 앨범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시스]
원정화는 군 장병 100여 명의 명함에 적힌 e-메일 주소를 중국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거점에 보고했고, 군 당국은 일부 군 장교의 e-메일이 중국에서 해킹당한 사실을 확인해 추적 중이다.

원정화는 탈북자로 위장, 합법적 신분을 얻고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군 장교들을 공략대상으로 삼는 등 군을 노린 북한 대남기관의 수법은 고도화됐지만 군 당국의 대책은 허술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27일 “군 간부들이 연루된 데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국민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전군에 특별 보안진단을 실시하고 장병 정신교육과 탈북자 출신 강사에 대한 신원조회를 강화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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