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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이’ 남자 리듬체조 선수 김응진·정천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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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응진(앞)·정천우 선수가 리듬체조 포즈를 취했다. [조문규 기자]

준수한 청년 둘이 체육관에 들어선다. 몸에 붙는 검은색 벨벳 의상에 스팽글 장식이 반짝인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링과 곤봉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가 깔끔하게 받는 이들은 대한민국에 둘뿐인 남자 리듬체조 선수, 김응진(29)·정천우(29)씨다. “남자가 무슨 리듬체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들에게는 익숙한 반응이다.

“남자 리듬체조 선수라고 소개할 때마다 핀잔도 듣고, 시범경기를 펼치려 마루에 서면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리듬체조가 좋은 걸요.” (김응진)

우아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여자 리듬체조와는 달리 남자 리듬체조는 박진감과 역동성, 절도 있는 동작을 중시한다. 남자 리듬체조가 시작된 건 1960년대 일본이다. 이후 미국·캐나다·쿠바·중국 등 10여 개국으로 퍼져나갔다. 종주국 일본에는 선수가 6000여 명에 이른다.

여자 리듬체조와 달리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어서 일본에서 격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가 가장 큰 규모의 경연장이다. 김씨와 정씨 모두 이 대회에서 화려한 입상 경력을 자랑한다. 2005년 대회에서 김씨는 종합 2위, 정씨는 3위에 올랐다.

남자 리듬체조가 한국에 상륙한 건 2001년. 그 전에 두 사람은 기계체조 선수였다. 김씨는 경희대 소속으로 국가대표 2진까지 뽑혔고, 정씨도 한국체대 소속 기대주였다. 그러다 훈련 도중 부상으로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 대한체조협회가 리듬체조 선수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코치들로부터 들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죠. 그런데 시험 삼아 한 번 해본 뒤 ‘이게 정말 내 운동이구나’라고 느꼈어요.” (김응진) “행복하더라고요. 기계체조를 할 때보다 신나고 즐거웠어요. 이 길을 가자고 결심했죠.” (정천우)

순탄치 않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가시밭길일 줄은 미처 몰랐다. 반대하고 걱정하는 가족은 설득할 수 있었지만 2005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대한체조협회에서 남자 리듬체조를 등록종목에서 퇴출시키며 지원을 끊은 것이다. 비인기종목이라는 게 이유였다. “처음에 선수가 60명 정도 있었는데 협회 지원이 끊기고 상황이 힘들어지자 다 떠나고 둘만 남았어요.” (정천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러 체육관을 전전하며 연습했고, 코치가 없으니 서로의 연기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모니터를 해줬다. 또 인터넷 동영상으로 세계 남자 리듬체조계 동향을 살피고, 유행을 파악해 안무를 짰다. 일체 지원이 없다 보니 의상 디자인도 본인들 몫이다. 기자와의 인터뷰 때 입은 벨벳 운동복도 본인들의 작품이다. 동대문시장을 직접 돌며 고른 스팽글 장식을 손수 바느질해 의상을 만들었다며 쑥스러워했다.

이들은 지난주까지 올림픽 열기를 지켜보면서도 마음 한 켠이 쓰라렸다. 친구이기도 한 기계체조 양태영 선수, 여자 리듬체조 샛별 신수지 선수의 경기를 유심히 보며 응원했지만 부러움이 앞선 게 사실이다. 그래도 스스로 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고 강조한다. “목표가 있고 꿈이 있는데 쉽게 포기할 순 없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죠. 최선을 다해서.” (김응진) 지금도 다음달 초 김포에서 열리는 리듬체조선수권대회 때 남자 리듬체조를 시범경기로 선보일 예정으로 맹연습하고 있다. 체조선수로는 고령인 29세지만 끝까지 열심히 해보겠다는 각오다.

부모 도움으로 여기까지 버텨왔지만 생계 걱정도 무시할 수는 없어 이번 주 용인에 스포츠 교육 학원을 연다. 학원 운영의 큰 목표는 리듬체조 꿈나무 양성이다.

어렴풋하지만 조금씩 희망의 끈도 보인다. 최근에는 리듬체조 선수가 꿈이라는 아홉 살 허형석군도 소개 받았다. 또 올해 남자 리듬체조부를 신설한 용인 이동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가르친다. 일본에 갔다가 남자 리듬체조 시범을 인상 깊게 본 교장 선생님이 남자 리듬체조부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꿈나무를 키워가면 결국 저변이 확대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 ‘남자 리듬체조의 꽃’이라는 6인조 단체 경기도 언젠가는 반드시 해낸다는 각오다. 다시 대한체조협회 소속이 돼 안정을 찾고 싶은 소망도 조심스레 나타냈다.

“막상 경기를 본 관객들은 남자 리듬체조의 매력에 반하거든요. 묵묵히 알려가면 결실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언젠가는 단체전도 반드시 도전해야죠.” (정천우)

사진 촬영을 위해 링을 들고 다시 마루에 선 그들. 서글서글한 눈매와 미소가 다시 매섭게 변했다.

글= 전수진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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