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등신대의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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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정부는 3일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제2회 유엔인간주거회의에『지난해의 고베(神戶)대지진이 천재(天災)인 동시에 대인재(大人災)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공식문서를 제출했다.비정부조직(NGO)이 작성한 문서를 정부가 추인하는 형식을 취하긴했지만 이로써 일본정부는 적절치 못한 당국의 대처로 피해가 더늘어났다는 국민의 소리를 겸허히 수용했다.
고베대지진이 본질적으로 불가항력의 천재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본국민은 없다.그렇지만 당시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가 취한 위기관리태도는 국가장래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비판 역시 그치질 않았다.무라야마 총리는 사고방식.정치경력을 볼 때 기본적으로 책임지고 국가위기관리를 맡을만한 인물이 못 되며 그런 지도자가 저지른 부작위(不作爲)의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강조하는 의견이 많았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지진은 전쟁이나 다름 없다.정보나 과학지식으로도 도저히 예상 불가능하며 그 파괴력이 엄청나다는 점에서 전쟁이상일지 모른다.때문에 외적은 외국의 군인이 아니라 무수히많은 일본열도의 활단층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려 있 다.
전쟁의 방어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하느냐가 요체다.지진은 더하다.한국의 민방위훈련이 북한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것이라면 일본의 방재(防災)훈련은 지진대피가 거의 전부다.
2년넘게 도쿄(東京)에 살면서 나도 진도2~4의 지진을 몇번 겪었다.자다가 침대가 흔들려 깨고나면 저절로 식은 땀이 나고 일본에 사는 것 자체가 불안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않다.
각종 사후진단들을 종합해보면 무라야마총리가 유사시 총리로서 해야할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은 다음과 같다.국군통수권자로서 자위대병력 투입을 조기에 결정하지 못한점,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파괴소방의 결단을 못내린 점,긴급구조차량 의 통행로를신속히 확보하지 못한 점,급수(給水)가 안되는 상황에서 화학소화제 사용의 결정을 못 내린 점 등.이 때문에 최소 1천명의 사망자가 더 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모두가 군(軍)의 존재,행정의 메커니즘을 조금이라도 알거나 위기관리 인식이 있는 보통의 총리라면 당연히 취했어야 할 조치들이라는 것이다.평생 야당으로 정치투쟁이나 하고 각종 방재훈련에 자위대 참여조차 반대해온 무라야마 총리로선 발상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란 지적도 많았다.아울러 그런 사람을 국정최고지도자자리에 앉힐 수밖에 없었던 일본정치의 난맥과 일본사회 전체에깃들고 있는 「안전신화」붕괴를 개탄하는 소리가 잇따랐다.
사실 잦은 천재지변에 세계적 침략전쟁을 치른 탓인지 일본의 안전대비는 유별난데가 있다.「준비는 비관적으로,대처는 낙관적으로」.일본인들의 몸에 밴 생활규범이자 조직관리자들이 공유하는 상식이다.당장 전쟁이 나고 땅이 흔들릴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근거하는 것이 위기관리다.요인경호도 마찬가지다.당장 내앞에서 요인이 암살된다는 전제와 긴장이 없으면 경호할 필요가 없다. 이런 위기관리 문화에 익숙해진 일본지역 평통자문위원(3백83명)들은 최근 고국방문후 말못할 우울함을 느낀다.지난달 중순 청와대를 방문했을때 들은 대통령의 이야기.『우리는 큰나라가 됐다.아태경제협력체(APEC).아시아유럽정상회의(A SEM)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이승만(李承晩)대통령때는 힘이 없었다.…오늘은 그렇지 않다.65만 강군(强軍)이 있고 강력한 현대무기를 갖고 있다.…4강(强)이란 말을 쓰는데,꼭 쓰고 싶으면 우리까지 넣어 5강이라고 하자….』 듣기에 좋았고 자부심도 생겼다.그러나 며칠후 북한의 미그기가 넘어왔는데 서울의 경보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는 기사가 일본신문들에 크게 보도됐다.
다리는 무너지고,백화점은 내려앉고,하늘은 뚫리고….『아,어느 것이 등신대(等身大)의 한국 인가.조국은 지금 어디쯤 서 있는가.』 (일본총국장) 전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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