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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벨파스트에 색을 입혀준 로열벨파스트 골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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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관련 책자를 보면 아직도 북아일랜드를 다소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특히 수도인 벨파스트와 런던데리는 더 조심해야 한다고 밑줄 쫙, 별표 땡땡이다. 북아일랜드에 대한 저항 운동의 상징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의 본거지가 바로 이들 도시였기 때문이다.
물론 2005년 아일랜드공화군(IRA)이 비폭력 운동을 선언한 이후 북아일랜드 모든 지역이 안전해졌다고는 하지만 30년을 끌어온 무장투쟁, 그보다 더 오랜 반목과 갈등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정치적 상부구조의 화해 무드는 사회의 다중층위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 하여 소심한 두 여행자는 처음 북아일랜드에 입성해서도 수도인 벨파스트를 그냥 스쳐 지나갔고 분쟁의 흔적이 없는 북쪽 끝 ‘안전한’ 마을에서 북아일랜드 워밍업을 했다.

걸프전 당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가녀린 여기자, 그녀의 “MBC 뉴우~스 이진숙 입니다.”라는 특유의 억양에 매료되어 급기야 나도 종군 기자가 되겠노라 결심하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신문방송학과를 갔던 이 어이없는 영혼. 알고 보니 그 영혼은 이미 몇 년 전에 내전이 끝난 벨파스트 입성도 두려워하는 새가슴이었던 것을……. 하지만 골프의 땅 스코틀랜드로 출항하는 카페리를 타기 위해 벨파스트는 어쩔 수 없이 필수 코스였다.

큰 맘 먹고 들어선 벨파스트는 아일랜드어로 "The sandy ford at the river mouth"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바닷가 도시다. 아일랜드 지도에서 벨파스트 위치를 보면 그 의미가 확연히 다가온다.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기어들어온 만에 위치하고 있다. Cavehill을 비롯한 여러 언덕이 도시를 둘러 싸고 있다. 케이브힐은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에 벨파스트는 조선소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렸고 1911년 이 곳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배가 ‘타이타닉’호다. 여러모로 한 번 쯤 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긴 하다.

금요일 오후 5시 무렵, 주말의 시작이라 시내 중심가 호텔을 가까스로 하나 잡을 수 있었다. 호텔 내부의 복도는 마치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다중의 잠금장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랜 갈등의 상처가 모든 건물과 방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우리 여행의 몇 안 되는 원칙 중 하나가 대도시에서는 시내 중심가에 숙소를 잡아 씨티 투어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었다. 벨파스트에서도 그 원칙을 고수했는데 다른 도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당황스러웠다. 어디를 가더라도 금요일 저녁의 시내 풍경은 늘 화려하고 북적이고 활기찼다. 특히 더블린 템플바 거리에서 해방감에 날뛰었던 것이 불과 몇 일 전인데 갑자기 다운된 벨파스트의 회색 거리 느낌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간단히 호텔에서 저녁을 때우고 외출은 포기했다.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위험하다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무료함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뭔가 우리의 선입견이 개입되었다고 치부하기엔 을씨년스러운 무채색 도시와 도시민들의 단단한 표정이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유일하게 생명력 있게 다가오는 대열은 열에 아홉이 관광객이었다. 호텔 바로 옆에 위치한 클럽에도 금요일 댄스 파티를 즐기기 위한 무리들이 드나들고 있었지만 화려한 복장의 손님 보다는 썬그라스 끼고 무전기 이어폰을 낀 채 서 있는 기도 아저씨들이 주인공처럼 보였다.

다음날 일찍 시내 투어를 했다. 다행히 어제 저녁에 본 모습 보다는 컬러가 보충된 거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도시들과 비하면 여전히 심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지체 없이, 미련 없이 골프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골프장은 다행히 초록이었다. Royal Belfast G.C.는 1881년 개장한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장이다. 1881년 여름, Mr. Thomas Sinclair가 스코틀랜드에 사는 친구의 초청으로 세인트 앤드루스 골프장에서 휴가를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골프를 처음 경험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그는 아일랜드로 돌아오자마자 절치부심 하여 골프장 부지를 찾아 나섰고 그 해 11월 9일, 9홀을 완성해 내면서 아일랜드 골프장의 역사도 열었다.

그 후 아일랜드의 골프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했고, 골프장 회원은 늘어만 갔다. 결국 1925년 더 넓은 부지를 찾아 현재의 위치인 Craigavad에 18홀 골프장이 완성되었다. 코스 설계자는 로열 포트러쉬 등을 설계한 Harry Colt가 맡았는데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로열 포트러쉬 골프장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바다와 맞닿아 있지만 주상 절리와 맞닿아 무섭게 부서지는 북쪽 바다와는 달리 깊숙이 만으로 들어온 바다는 평온했다.

로열 벨파스트 골프장은 아일랜드 골프장 중에 ‘로열’ 칭호를 받은 단 네 개 골프장 중의 하나로 남다른 격을 자랑한다. 특히 클럽하우스의 위용은 남달랐다. 무겁고 단단한 느낌의 석조 외벽 느낌도 고풍스러웠지만 톰 모리스의 드라이버부터 창립 멤버들이 입었던 주황색 자켓까지 전시된 내부는 아일랜드 最古의 골프장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풍겨주고 있었다.

바닷가 골프장임에도 링크스가 아닌 파크랜드 형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부담 없고 편안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삐딱하게 누운 페어웨이와 많은 수의 벙커, 그린의 까다롭고 미묘한 라이가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혀댔다. 또한 오르막 홀과 내리막 홀이, 오른쪽 도그렉과 왼쪽 도그렉이 사방 교차하며 정신을 빼 놓기 일쑤였다.

6,306yd의 파71의 만만해 보이는 코스는 거리 보다는 정확성을 요하는 은근히 까다로운 코스였다. 아일랜드 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골프장이라는 프로샵의 소개를 듣고 출발했지만 풍경이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코스에 이리저리 끌려 다녔던 전반 홀을 마치고 이제 뭔가 감을 잡았다 싶었던 후반 무렵, 청명한 하늘 아래 선명하게 보이던 수평선과 범선들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우리를 덮쳐온 물안개…. 결국 30~40분 동안 라운드를 중단해야 할 정도로 한 치 앞도 허용하지 않는 짙은 안개의 공격이 있었다. 그야말로 난타 당한 전반 홀, 오리무중 후반 홀이 되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드라이버를 지팡이 삼아 더듬거리며 찾아간 그늘 집에서의 간식 대담은 즐거운 골프장 추억으로 남았다.

무채색으로 묻힐 뻔한 벨파스트의 심심한 추억에 선명한 초록색을 입혀준 로열 벨파스트 골프장. 어디를 가도 18홀, 초록색의 골프장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데 갈 때마다 가는 곳마다 신나는 것이 또 골프장이고 보면 여러 사람 폐인 만드는 골프의 매력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