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목표'를 제시할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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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연이어 벌어진 우리 축구 대표팀과 두 이탈리아 명문팀간의 대전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과 성정(性情)을 잘 나타내준경기였다.뚜렷한 목표가 주어지고 신바람이 나면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민족이 바로 우리들이다 .두 이탈리아팀이 시차로 인한 피로와 주전의 결장(缺場)으로 전력이 평소와달랐던 것은 사실이었다.그러나 세계 정상의 팀으로부터 합해서 7골이나 뽑아내며 두 경기를 모두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팀들이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팀이 너무 잘 했기 때문이다. 월드컵 유치가 국민적 열망이 되자 선수들도 멋진 경기로 분위기조성에 단단히 한 몫을 하겠다는 마음들을 먹었고 바로 그것이 평소실력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준 것이다.
속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내친 걸음에 끝장 본다」는 표현까지있는 것을 보면 예부터 우리 겨레는 한번 열이 오르고 신바람이나면 자주 기대이상의 결과를 낳아왔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돌이켜 보면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지난 한 세대동안의 우리경제성장도 우리들의 그런 기질이 십분 발휘된 결과일 것이다.「잘 살아보자」는 공감할 수 있는 국가적 목표가 설정되고 자극이주어지자 국민의 잠재력이 불붙어 올랐고 그것이 사회를 움직이는동력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의 위치에 오기까지에는 적어도 세가지 동력이 있었다.하나가 바로 근대화동력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경제적 동력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적 자유를 지향하는 민주화동력이며,또다른 하나가 분단을 해결하려는 통일동력이었다.
이들은 때로는 서로 마찰하면서 큰 혼란과 갈등을 빚어내기도 했으나 이러한 동력이 왕성한 불꽃을 냄으로 해서 우리 사회가 역동성(力動性)과 활기에 가득찼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민주화 열망은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던가.낮밤을 정치 이야기로 지새우고 비록 결국 울분에 젖을 수밖에는 없었을망정 그 시절에는 마음속에 저마다 목표와 지향점이 있었다.
또 통일에 대한 열기는 얼마나 뜨거웠던가.이 또한 민주화 못지않게 중요한 사회적 담론이었고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에는 근대화도,민주화도,통일도 더 이상 담론의 대상이 아니고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더더욱 아니라는 느낌이다.경제만 해도 경제수준으로 보면 아직도 갈길은 멀기만 한데 어느새 우리 사회는 소비자본주의에 맛을 들 여 이제까지의 결실을 소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민주화도 실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사람이 바뀐 것은 분명하지만 정치행태면에서는 아직도 권위주의 시절의 그것을 쏙 빼어 닮은 상태다.그런데도 이런 민주화의제자리 걸음은 사회적 이슈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
통일문제에 관한 무관심은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최근 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수도권의 직장인들과 대학생중 45.8%가 「북한사회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통일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40대이상은 68%가 「그렇다」고 대 답했으나 20대의 경우 48.8%에 그치고 있다.더구나 38.7%는 「개인의 희생이 요구된다면 꼭 할 필요없다」고 대답했다.
이런 통일에 대한 무관심에 귀순한 탈북자들은 가장 큰 충격을받고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 공통된 목표나 지향점이 증발돼 버리면 사람들은 더욱더 본능적 욕구충족에 매달리게 마련이다.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싶은 심리 때문이다.아무리 단속해도 향락산업은 갈수록 번창하는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히로뽕이 갈수록 은밀 히 퍼져나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들은 월드컵 유치만이 아니라 더 큰 국가적 목표를 향해 다시 뛰어야 한다.적절한 목표와 동기를 부여해주기만 한다면 국민들은 얼마든지 다시 뛸 자세가 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국민의 에너지를 모으고 불태울 수 있는 사회적 목표를설정해 바람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대통령을 꿈꾸는 그 많은 정치인들도 욕망만 부풀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어떤 공동 목표를 제시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해야 할 때 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한국호는 바야흐로 역동성을 잃고 있는 중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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