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위안스카이(袁世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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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시절의 위안스카이(가운데). 김명호 제공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오척 단구였다. 다리가 짧고 상체는 통통했다. 항상 팔자로 걸었다. 서 있을 때나 걸을 때 모두 두꺼비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표정이 풍부하고 몸놀림이 민첩했다. 툭하면 화를 냈지만 생각은 합리적이었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중국인은 예부터 이런 유형의 사람을 일컬어 꾀가 많고 매사에 정력적이라고 했다. 절대 싸우지 말라고 했다.

그의 두 눈은 맑고 우아하면서도 예리했다. 내방객은 그의 눈빛에서 경고를 느끼지 못했다. 적의가 없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 눈이었다. 당시 중국 주재 미국 공사는 “그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눈동자를 보면 그가 얼마나 총명하고 건강하며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서태후와 이홍장(李鴻章)은 위안스카이를 귀여워하고 믿음직스러워했다. 청일전쟁 이후 그에게 신건육군(新建陸軍)의 훈련을 맡겼다. 7000여 명의 무장 병력을 안겨준 셈이었다. 톈진(天津) 인근의 작은 마을이 훈련장이었다.

위안은 기억력이 뛰어났다. 경이로울 정도였다. 특히 인명과 지명은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잠깐 만난 사람의 이름과 관향을 비롯해 당시의 세세한 상황과 취향까지 기억해 내곤 했다. 위안의 박학함과 기억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기록이 허다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감동하며 심복했고, 그 다음부터는 무서워했다.

1901년 말 11개국과의 불평등조약에 서명한 이홍장이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태후는 신정(新政)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관제개혁, 상공업 장려, 공직기강 확립, 학제개혁 등 지금도 개혁가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책은 없이 구호처럼 외치다 흐지부지되는 그런 것들이었다.

산동순무(山東巡撫)였던 위안스카이는 ‘군비 증강’을 포함한 신정10조(新政十條) 방안을 조정에 제출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한 최초의 지방관이었다. 서태후는 이홍장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직례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에 위안을 임명했다. 이어서 연병대신(練兵大臣)도 겸하게 했다.

위안스카이는 6만 명의 상비군을 편성했다. 보병·포병·공병 등 병과를 신설하고 독일에 군인 유학생을 파견했다. 위안은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전술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야외 훈련장에 살다시피 했다. 서재에 틀어박혀 끙끙대며 문장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강군의 비결이 ‘절대복종’이라는 것을 단시간 내에 파악했다. 양손에 칼과 돈을 쥐고 병사들을 단련했다. 복종하면 계급과 재물이 보장됐다.

복종하지 않으면 칼을 삼켜야 했다. 그는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부모였다. 기억력이 뛰어난 그는 최말단 지휘관의 이름과 성격, 취미와 장단점을 완전히 파악하고 봉급도 직접 나눠 주었다. 신해혁명 이후 16년간 중국의 정권을 장악하고 대총통을 줄줄이 배출한 북양군은 저절로 탄생한 게 아니었다.

위안스카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무대를 종횡무진 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대형 사건마다 그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판도가 변했다. 서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성사는커녕 위안에게 먹혀 버리기 일쑤였다. 위안스카이는 항상 주역이었다. 조연으로 출발한 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쑨원(孫文)·황싱(黃興)·량치차오(梁啓超)·장빙린(章炳麟)등 일세를 풍미한 대혁명가와 정론가들을 손안에 갖고 놀았다. 이들은 위안스카이에게 농락당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숨만 내쉬며 위안의 이름 앞에 붙일 ‘절국대도(竊國大盜)’ ‘몰염치한 매국적(賣國賊)’ ‘전제폭군(專制暴君)’ ‘음모가(陰謀家)’ 등의 용어나 생각해 내는 게 고작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정통 유가(儒家)가 말하는 표준형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극적인 말 몇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간단한 인물도 아니었다. 풍부한 행정 경험을 갖춘 개명한 정치가였다. 공화제를 최초로 실현했고 비록 만장일치였지만 중국 역사상 최초로 투표에 의해 총통에 취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民主)를 ‘무주(無主)’로, 공화를 ‘불화(不和)’로 단정한 아주 복잡한 사람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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