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삼촌같은 넉넉한 연기 돋보이는 배우 정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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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재영은 최신작 ‘신기전’에서 장사치 우두머리 출신으로 로켓형 화포 신기전의 개발을 돕는 주인공 설주를 연기했다. [최승식 기자]

정재영(38)의 연기는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설사 요약해도 ‘그런데’나 ‘그럼에도’를 추가해야 흡족해지는 캐릭터에서 제 맛을 내곤 한다. 올 봄 ‘강철중’의 조폭 두목이 대표적이다. 누가 봐도 악당인데도 부인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비롯, 인간적으로 공감할 풍부한 여지를 제공한다. 그는 “시나리오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했지만, ‘강철중’의 시나리오는 연극무대 시절부터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장진 감독이 썼다. 장진 감독은 “통속적이고 평범한 캐릭터에서 놀랄 만큼 풍부한 디테일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배우”라며 “선과 악, 부자와 가난, 특별함과 평범함을 고루 넘나드는 옥타브가, 내가 아는 배우 중 가장 넓다”고 말했다.

최신작 ‘신기전’(9월 4일 개봉)에서 그가 주인공 설주를 소화하는 방식도 그렇다. 조선시대 장사치 출신의 거친 남자 설주는 미모의 여성 과학자 홍리(한은정)를 처음 본 순간부터 속칭‘들이대기’시작한다. 그럼에도 느끼하기보다는 능청스럽고, 그래서 코미디의 맛을 더하는 것이 역시나 정재영답다. 혹자는 이런 그를 두고 “삼촌 같다”고 했다. 꽃미남에게 붙는 ‘오빠’나 카리스마를 내세운 ‘형님’ 대신 어떤 캐릭터에도 정재영식 플러스 알파를 충실한 옵션으로 구사하는 넉넉함을 지칭하는 얘기다. 그와 점심을 겸해 만난 자리도 그랬다.

-조폭이어도 밉지만은 않고(강철중), 암만 들이대도 느끼하지 않은(신기전) 캐릭터가 돋보이는데.

“사람이 다 그렇지 않나. 암만 무서운 깡패라도 집에서는 자식한테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 수퍼맨도 변신 전에 어리버리한 모습이 있으니까 매력적이다. 한 면만 보여주면 재미가 없다.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관객들도 좋아하는 것 같고.”

무심결에 아쉬움도 내비쳤다. “어떤 면에서는 다양하게 보여주는 게 별로 좋은 게 아니다. ‘멋있는 놈’‘센 놈’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집중해서 깊이 파면 더 세게 와닿지. 그래야 연기 잘한다는 인상도 들고. 어떤 면에서 나는 밋밋하다.” 그러고 보니 이렇다 할 시상식에서 주연상을 받은 이력이 없다.

-‘강철중’은 설경구·정재영의 투톱이라는 점에서 연기대결에 신경이 쓰였을 텐데.

“같이 나오는 장면이 세 번뿐이다. 경구 형도, 나도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다. 자기의 액션으로 다 책임을 지려는 게 아니라 상대의 리액션을 중시하는 점에서. 남의 덕을 봐서 날로 먹으려는 것이지(웃음).”

 정재영은 통속적인 인물에 새로운 디테일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배우다. 왼쪽부터 ‘웰컴 투 동막골’(2005)의 인민군 장교 리수화, ‘바르게 살자’(2007)의 고지식한 교통순경 정도만, ‘강철중’(2008)의 폭력조직 두목 이원술.

-선배가 아닌, 예컨데 학교(서울예대)동기이기도 한 황정민이었다면.

“(경쟁심이)선배라고 있고, 동기라고 없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모든 배우한테, 진짜 친한 배우들(송강호·박해일·신하균·임원희 등등)한테도 다 느낀다. 강호 형은 언제까지 저렇게 잘할까, 유학 보내야 하는데(웃음), 심지어 한참 어린 덕환이(류덕환)한테도 쟤 때문에 나 못하면 어떡하지(웃음), 나이도 어린 게 따로 연습하나, 이런다. 근데 이런 게 필요하다. 이게 없어지면 도인이지. 깨달음을 얻으려고들 하지만, 정작 깨달아 버리면 힘들 것 같다. 그때는 연기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이게 내가 연기하는, 좋은 배우가 되려는 원동력 아닐까. “

‘신기전’은 그로서는 첫 사극이자 멜로로도 처음이나 다름없다. ‘아는 여자’(2004년)도 일종의 멜로지만 입맞춤은 꿈도 못 꾸는 숫기없는 멜로였다.

“결혼 전에? 여자 앞에서 잘 못했다. 와이프 앞에서나 재롱을 부렸지. 여자들도 미혼 때는 내숭을 떨지 않나. 남자의 내숭이라면 터프함이다. 결혼하고 나서는 그런 터프한 내숭도 없어졌다. 이성 간에도 대하기 편해졌다. 살면서 제일 달라진 점이다.”

그 말대로, ‘신기전’에서 설주·홍리의 관계는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면서도 격정보다는 여유가 흐른다.

-‘신기전’의 김유진(58)감독은 한참 손위에다 영화로도 처음인데.

“무서운 분 아니냐고들 하는데, 촬영 전에 나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다. 시나리오에 대한 생각도 거리낌없이 말씀드렸는데 다 받아 주시더라.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은 촬영을 시작하면서 들었다. 본능적 연기와 계산적 연기를 철저하게 알아챈다. 특수효과나 액션은 본인이 잘 모르는 영역이라고 스태프들한테 맡기면서도, 그 장면에서 ‘어떤 느낌이 나와야 한다’는 주문이 뚜렷했다. ”

촬영순서로는 ‘신기전’이 ‘강철중’보다 앞이다. ‘신기전’은 촬영기간만도 8개월이 걸렸고, 컴퓨터그래픽 등 후반작업에도 그만한 시간이 들어갔다. 곧 이어 그는 이해준 감독의 신작 ‘김씨표류기’를 촬영한다. 투신자살을 시도한 남자가 엉뚱하게도 밤섬에 표류해 무인도 생활을 하는 이야기다. 역시나 평범함을 특별하게 연기하는 배우 정재영에게 제격인 캐릭터라는 말이 돌고 있다.

글=이후남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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