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표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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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표 있어요?”

취재차 공연장에 혼자 가는 날에는 출입구에서 점퍼 차림의 중년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온다. 나에겐 10년전부터 낯익은 암표상이지만 상대방의 시선을 피하다 보니 내 얼굴을 알아볼 리가 만무하다. 한번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뭐하게요?”라고 되물었더니 놀라서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나홀로 관객은 로비에서 약속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여분의 티켓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함께 오기로 했던 사람에게 불가피한 사정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열렬한 음악애호가라도 대부분 친구나 가족과 함께 온다. 예매 티켓은 물론 초대권도 2장 단위로 발행된다.

로비 입구에서 암표상을 만나는 날은 매진됐거나 초대권을 무더기로 남발한 공연임에 틀림없다. 초대권이 헐값으로 암표상의 손에 흘러들어가 정가보다 싼 암표로 둔갑한다. 티켓을 예매했다가 공연 직전에 관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싸게 내놓는 표들을 수집해 되팔기도 한다. 파리 오페라와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도 암표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주로 체류기간이 짧은 외국 관광객들이 주 고객층이다.

암표는 예매 시스템의 부산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연을 놓치지 않고 볼 사람에겐 예매는 더 없이 고마운 제도다. 좋은 좌석을 미리 확보하는 것은 물론 할인 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 매진이 예상되는 ‘핫 티켓’은 예매자들이 더 늘어난다. 하지만 사업상 갑작스런 일정이 발생할 높은 비즈니스맨은 티켓 구입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룬다. 이 때문에 암표상이 활개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표를 예매했다가 공연 당일에 액면 가격보다 비싸게 되팔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겐 프리미엄이 잔뜩 붙은 암표 가격 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출발일에 임박해서도 쉽게 항공권을 구할 수 있는 비즈니스석을 생각하면 된다. 미국에서 1999년 스타워즈 에피소드Ⅰ 영화 개봉일에 연결된 8자리는 600달러(약 60만원)에 되팔렸다. 정가의 60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한 명의 관객이 구입할 수 있는 예매 티켓의 매수를 제한하거나 극장에 경찰을 배치해도 암표상은 근절되지 않는다. 적발시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1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지만 암표 거래를 막아서는 안되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게 많은 경제학자들의 지론이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본주의 시장 원칙 때문이다. 철저하게 현금 거래이기 때문에 신용 카드 거래와는 달리 거래 내역을 추적할 수도 없다. 암표상은 적시적소(適時適所)의 가치를 팔아 이익을 챙긴다.

경제학자들은 암표 덕분에 극장의 객석점유율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개막 직후 관중석이 텅비었다가 공안이 암표 거래를 눈감아 주면서부터 슬슬 차기 시작한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도 그렇다. 물론 암표 거래 또는 티켓 전매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가에 따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암표를 팔다가 적발되면 경범죄위반으로 1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렇다면 매진과 암표 거래가 불을 보듯 뻔한 공연이라면 처음부터 티켓 값을 인상하면 어떨까. 하지만 공연 주최측에서는 수요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섣불리 티켓값을 올릴 수도 없다. 스포츠팀이나 아티스트의 경우 전석 매진은 곧 소속팀이나 예술가의 이미지와 명성을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표값을 약간 싸게 책정하더라도 매진만 된다면 보이지 않는 플러스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극장이 직접 주최하는 공연에서는 매진공연에선 주차장, 레스토랑 이용객도 늘어나 짭짤한 부수입을 올릴 수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어렵사리 전석 매진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 공연 관람의 감동을 더욱 배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미식 축구 NFL의 경우 전석 매진 되지 않은 경기는 TV 중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TV 방영에 따른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비교적 싼값에 티켓을 발매해 전석 매진을 유도한다. 팬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라도 전석 매진은 필요하다.

티켓 발매 후 얼마 되지 않아 전석 매진이 된 경우도 티켓 브로커나 암표상의 개입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정작 공연 당일 일부 객석은 텅 비어 있을 수도 있다. 공연 개막에 임박해질수록 암표값이 내릴 수도 있지만, 암표상은 미리 구입한 표를 다 팔지 못하더라도 이미 비싼 프리미엄을 붙여 판 암표 덕분에 충분한 차익을 챙겼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비싼 값을 고집할지도 모른다.
극장 출입구에서 공연 직전 길게 줄을 세운 다음 현금을 받고 입장시키는 전근대적인 방식을 다시 도입하면 암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사실 초창기에는 공연 당일 아침 극장 입구에서 표를 팔았다.

예매는 박스석에 한해 가능했다. 매표소를 지금도 박스 오피스(box office)라고 부르는 이유다. 박스석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경우 개인 소유여서 가문의 유산처럼 물려줬다. 파리 오페라는 해마다 임대 계약을 맺었다. 좌석 예약은 박스석을 통째로 빌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의 특권이었다. 박스석의 소유자나 임대인이 출타 중일 때는 좌석권을 되파는 경우도 생겨났다. 박스석을 확보할만한 경제적 여유는 없는 중산층들은 아침 일찍 하인을 보내 좋은 자리를 확보했고 새벽부터 기다렸다가 대기 순번을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신종 부업도 생겨났다.

예매와 지정 좌석제는 근대 극장사의 혁명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줄을 서거나 대리인을 보내는 사회적 비용이 절감되었다. 그 대신 생겨난 게 암표상이다. 하루 저녁에 단막 오페라 2∼3개를 상연하는 경우는 한 작품만 보고 도중에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도 있었다. 도중에 나가는 사람에게 관객에게는 임시외출 또는 재입장 허가증(contremarque)을 나눠줬는데 이 또한 전매(轉賣)의 대상이었다.

예매 시스템 도입으로 티켓에 좌석번호가 명시되면서부터 객석의 구역별로 좌석마다 입장권 금액을 차등해서 매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티켓이 없어서 공연장 입구에서 현금을 내고 들어갔다. 당연히 자유석이어서 선착순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서로 먼저 입장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극장 앞은 아침 일찍부터 장사진을 이뤘고 극장 출입문을 열자마자 인파가 몰려들어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밟혀 죽거나 다치는 안전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용 가능한 관객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입장시켜 짜증을 유발하기도 했다. 1576년 영국 런던의 파리 가든, 벨 새비지(Bell Savage) 등 유랑극단의 공연에서는 출입구에서 1페니, 관람석에서 1페니, 지정석에서 1페니를 내야 했다. 객석 1층의 의자가 벤치형에서 팔걸이형으로 바뀌면서 극장 좌석에 번호를 붙이고 티켓에도 지정좌석제를 실시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초의 일이다.

객석의 위치에 따라 음향, 시야에 따라 가격대를 세분화하면 그만큼 관객의 불만도 줄어든다. 전석 균일가로 예매를 하게 된다면 조기 예매자들도 늘어나겠지만 공연이 가까워올수록 표를 사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다. 가장 좋지 않은 자리만 남았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공연장 입구에 나타나 표가 필요한지 남는 표는 없는지 물어보는 오프라인 암표상도 있지만, 온라인이나 경매를 통해 표를 되파는 브로커도 있다. 처음부터 공식 허가를 받고 합법적인 영업을 하는 경우다. 미국의 eBay가 대표적이다. 포리스터 리서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eBay의 전체 티켓 시장 매출액의 1%정도에 불과하다.

암표상은 가격을 써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게 아니다. 부당 이득을 취한다는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부분 액면 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되판다.하지만 승객의 이름이 티켓에 명시하는 항공권이 아닌 이상 티켓의 암거래를 막을 방법이 없다.

공연 주최측이 티켓의 일정 부분을 공연 당일까지 팔지 않고 갖고 있다가 공연 당일 현장에서 팔기도 한다. 입석까지 예매를 한다면 암표상들은 입석까지 싸게 샀다가 비싼 값으로 되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데이 티켓’(day ticket)이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학생이나 관광객들을 위한 입석이다.

뉴욕 브로드웨이나 뮤지컬 극장에서는 공연 개막 직전에 당일표를 타임스퀘어에 있는 가두 매표소에서 절반가격으로 판다. 물론 전석 매진이 안된 공연에 한해서다. 뉴욕대 경제학과 보몰 교수가 1973년에 처음으로 이같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정가로 판매하면 어차피 팔리지 않았을 티켓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다. 수요에 따라 가격이 변화하는 자유시장 원리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암표도 마찬가지다. 턱없이 비싼 암표는 아무도 사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암표도 ‘적정 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암표 거래를 합법화하면 암표상이 난립해 경쟁이 심해지면서 암표 가격이 떨어질 수도 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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