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분양 급한 불 끄기 대출규제 완화 손 못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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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04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말 노무현 대통령과 회동했을 때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대한민국 부동산 40년』이었다. 부동산 정책이 일관된 제도와 시스템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은 경기에 따라 부동산을 부양하거나 억제한 탓이므로 부동산 정책은 정권 교체에 상관없이 큰 틀에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차기 정부에 대한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메아리 없는 부동산 정책

부동산 규제를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은 노무현 정부에서 금기였다. 당시 청와대는 “2004년 딱 한 번 시도한 인위적 경기 부양이 집값 폭등으로 이어진 것을 뼈아프게 반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21일 발표한 부동산 대책은 제목부터 ‘주택 공급 기반 강화 및 건설경기 보완 방안’이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규제를 풀고 업계를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금기를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정부는 언론과 부동산업계, 증시 애널리스트 등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세제나 금융은 손대지 않고 미분양이 쌓인 시점에 신도시를 더 짓겠다고 한 게 비판의 표적이 됐다. CLSA증권은 “현 정부는 투기 재연이나 야당의 공격을 우려해 부동산 시장을 되살릴 수 있는 조치를 적절한 시점에 내놓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신도시를 두 개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공약 위반”이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역설적으로 제2, 제3의 대책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국민은행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금기가 무너진 이상 규제 완화 대책이 얼마든지 더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역대 정부에서 투기 대책이든 부양 대책이든 한 번으로 끝난 적은 없었다는 학습 효과도 이런 전망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기다리면 또 나온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1967년 강남 땅 투기 열풍을 막기 위해 도입된 ‘부동산 투기 억제세’로 막이 오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적 조치’라며 내놓은 78년 ‘8·8 대책’,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8·31 정책’에 이르기까지 대책이 쏟아졌다. 부동산 가격 안정 대책이 31건, 규제 완화 등을 통한 경기 활성화 대책이 17건이었다. 작은 것을 합치면 노무현 정부에서만 5년간 50여 건이 발표됐다는 통계도 있다.

부동산 값이 급등할 때는 세금과 규제, 공급 정책을 썼고, 반대로 경기가 침체하면 부양 수단으로 건설 규제 완화를 택했다. 지난 10년을 돌아봐도 정부는 97년 외환위기로 경기가 침체하자 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관련 규제를 전면 완화했다가 2002년부터 투기 억제로 선회했다. 이번 8·21 대책은 다시 부양으로 돌아선 신호탄이란 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다음 순서는 세제 완화
부동산 대책은 홍수 대책에 비유되곤 한다. 세금 규제는 강의 하류, 금융 규제는 상류에 비유된다. 상류 댐을 막으면 하류의 수위는 낮아진다. 전문가들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 가운데 효과가 가장 컸던 것으로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등의 대출 규제를 꼽는다. LTV·DTI 완화 역시 인화성이 그만큼 강하게 마련이다.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종부세·양도세)를 완화하거나 없애는 것도 파급 효과가 크다. 박합수 팀장은 “상담을 해보면 1가구2주택자가 집을 팔고 싶어도 높은 양도세율이 무서워 팔지 못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며 “양도세제를 손대지 않고선 거래에 숨통을 틔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소형 및 임대주택 의무 비율을 완화하거나 폐지하면 재건축 사업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사업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밖에 ^땅값에 전가되는 토지 양도세 부담을 덜어 주고 ^소형 주택의 전매 제한을 추가로 완화하며 ^1주택 장기 보유자의 보유세 부담을 줄여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여당은 앞으로 부동산 세제나 재건축 규제부터 푼 뒤 대출 규제까지 완화하는 다단계 수순을 밟을 공산이 크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당 정책위 의견을 종합적으로 면밀히 검토해 10월께 부동산 세제 개선안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연금 소득자가 종부세를 부담하면 집을 팔아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먼저 구제하고 장기적으로 1가구1주택 보유세도 완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출 규제는 가장 늦게 풀 듯
금융사의 건전성을 우선 고려하는 금융감독당국은 아직까지 대출 규제 완화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대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면 미조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JP모건증권은 “한국 정부는 결국 수요 부양을 위한 대출 완화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본다”며 “다만 인플레 우려 등을 감안해 당분간 관망하며 그 타이밍을 저울질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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