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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의 역사 칼럼] 중국의 전족, 조선엔 없었던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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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35면

중국에는 전족(纏足)이 있었다. 세계 여성사에서 전족은 악의 상징이다. 청대의 어떤 소설은 전족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 남자를 등장시켰다. 임지양이라는 남자가 왕비로 선발되면서 전족을 하게 되는 상황 설정이다. “한쪽은 무지막지하게 싸매고 한쪽은 단단히 꿰매는데 임지양의 주위에서 네 명의 궁녀가 그를 꼭 붙잡았다. 다 싸매고 나니 발에 숯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통증이 왔다. 그는 저절로 비참한 생각에 대성통곡을 했다. ‘나를 생매장시키는구나’. 두 발을 싸매고 나서 여러 궁녀가 급히 부드러운 바닥으로 된 붉은 신을 그에게 신겼다. 임지양은 오랫동안 울었다.”

전족을 하는 여자는 누구나 이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중국에서는 그렇게 전족이 유행하고 또 지속됐을까. 전족은 10세기께 무희들 사이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발을 좀 더 강하고 우아하게 보이기 위해 헝겊으로 감았다는 것이다.

송에서는 남쪽 지방이 개발되면서 돈을 번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은 이들 무희를 첩으로 들일 수 있었다. 첩은 부인에게 경쟁 상대였다. 부인들은 첩이 남편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봤다. 그리고 그 이유가 첩의 작은 발에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사실 작은 발이 더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부인들은 자신은 이미 틀렸지만, 어머니로서 딸의 발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딸의 발을 헝겊으로 감기 시작한 것은 바로 어머니들이었다. 자신의 딸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기를 바라서였다. 물론 첩과의 경쟁에서도 지지 않기를 바랐다. 남편의 사랑에 의해 자신의 위치가 달라진다면 여자들이 그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여자의 발을 싸맸다.

그런데 조선에는 전족이 없었다. 강력한 중국의 영향하에 있던 조선이지만, 전족으로부터는 자유로웠다. 왜 조선에서는 전족이 필요치 않았을까. 조선의 여자들은 남편의 애정도에 따라 그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다. 부인과 첩의 위치는 확연히 달랐다.

첩이 아무리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또 아들을 많이 낳는다 해도 부인의 지위를 넘볼 수는 없었다. 첩이 낳은 아들은 집안을 이을 수 없었다. 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였다.

조선의 여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는 것은 자신의 집안, 즉 친정을 통해서였다. 조선에서는 혼인에서 남자 집안과 여자 집안이 비교적 대등하게 결합했기 때문에 남자의 여자 집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남자에게 여자는 단순히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 집안의 대표자였다. 거듭 말하지만, 조선에서 여자들이 혼인 후에도 자신의 성(姓)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여자 집안의 대표자라는 표시이다. 여자들은 성적 이미지에 그다지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무의식 중에 중국과 한국의 이런저런 점들을 비교해 보게 된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중국과는 달리 성적 파트너보다는 집안 공동 운영자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