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오는 후진타오 <上> ‘올림픽 정치’ 성공 … 국내외 위상 급상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25일 한국을 방문한다. 그의 방한은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 바로 다음날이다.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세계적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한껏 과시한 후 주석이 올림픽 후속 외교의 첫 무대로 서울을 택한 것이다. 여기에 한·중 수교 16주년(8월 24일)이란 계기까지 맞아 떨어져 방한의 의미를 더하게 됐다.

후 주석의 방한은 권력서열 5위인 부주석에 있던 1998년을 시작으로 이번이 세 번째다. 2005년에 이어 중국의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재임 중 두 차례 한국을 찾는다. 특히 5월 이명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후 3개월 사이 모두 세 차례 정상회담을 한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당초 후 주석의 방한은 7월 초로 추진했으나 쓰촨성 대지진을 당한 중국이 지진 복구와 올림픽 준비란 과업을 동시에 치르느라 일정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정부 당국자는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한국을 답방한다는 약속을 지키고 이왕이면 수교 기념일의 의미를 살린다는 차원에서 일정을 잡다 보니 올림픽 폐막식 직후가 됐다”고 설명했다.

13억 중국인들에게 ‘100년의 꿈’으로 불리던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끈 후 주석은 가속도가 붙은 중국의 국가발전을 지휘할 리더십을 더 확고히 갖추게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층 강화된 그의 면모는 올림픽 개막 날인 지난 8일 70개국의 정상급 지도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은 자리에서도 이미 확인됐다. 오찬연회장인 인민대회당에서 세계의 정상들을 ‘알현’하는 듯한 광경을 연출했고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조차 30분간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을 계기로 후 주석의 새로운 리더십과 국가발전 전략이 구체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중국 최고 권력자로서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야망을 쉽게 드러내기보다는 은근히 때를 기다리며 묵묵하게 일해 온 후진타오 특유의 성공 스타일이 자리하고 있다.

수력발전 분야의 엔지니어를 꿈꾸던 후진타오가 명문 칭화(淸華)대에서 수리분야를 전공한 뒤 간쑤(甘肅)성의 기술요원으로 일할 때만 해도 그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안후이성에서 찻잎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집안이란 출신배경도 그랬다.

하지만 74년 간쑤성 건설위원회 당비서가 되면서 그는 기술자에서 당 관료로 변신을 꾀한다. 국가지도자의 길로 후진타오를 이끈 사람은 덩샤오핑의 오른팔로 불린 후야오방(胡耀邦)이다. 지방시찰을 나왔던 후야오방의 눈에 든 후진타오는 89년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당위원회 서기로 발탁된다.

그해 3월 1만여 승려와 티베트인이 수도 라싸의 거리를 점거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후진타오는 직접 철모를 쓰고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런 후진타오의 단호한 행동을 놓고 일각에서는 무자비한 탄압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 같은 강인한 인상은 그가 중국 최고지도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중앙 무대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베이징 올림픽 직전 불거진 티베트 독립 유혈시위와 대지진, 테러사태 같은 대형 악재를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한 것도 후진타오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란 평가도 있다.

25일 낮 110여 명의 수행 보좌진 등과 함께 특별기편으로 도착하는 후 주석은 오후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이번 서울 정상회담에서는 북핵 검증 방안에 대한 이견으로 지체되고 있는 비핵화 2단계의 조기 마무리 방안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해 논의할 전망이다. 과거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빛을 발한 중국의 전성기를 재현하겠다는 이른바 강한성당(强漢盛唐)에 공을 들여온 후진타오 주석의 이번 방한 행보에는 그래서 국제외교가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영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