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본능에만 충실한 이‘짐승’들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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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시로, 94년 소설로 각각 등단한 작가 이응준(34)씨는 “‘새로운 작품에 전력투구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주변의 우정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3년 전부터 이미 발표했던 소설집들의 문장을 마음에 들도록 다듬었다”고 밝혔다.

앞으로만 내닫지 않고 뒤도 돌아본 덕분에 이씨는 지난해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개정판을 낼 수 있었다. 또 이번에는 세번째 소설집 『무정한 짐승의 연애』와 함께 두번째 소설집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의 개정판도 내놓았다.

『무정한…』의 개정판을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씨는 “내 문장을 궤도에 올려놓고 쓴 첫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전 작품과 달라진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소설집에 묶인 아홉편의 단편 모두 ‘짐승’을 화두로 삼고 썼다”고 밝혔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를 들여다 보자.

주인공 ‘나’는 황하반점의 옛날 손자장면과 근린공원의 적막, 이 두 가지가 위안거리의 전부인 스물여섯살 실업자다. 나는 공원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호통치던 할아버지가 요즘 눈에 띄지 않자 참 잘 죽었지 싶어 짧게 환호한다.
어느 날 나는 차도에 뛰어들어 치여 죽게 생긴 뒷다리 하나 없는 잡종개를 목숨 걸고 구출해 정을 붙이며 돌본다. 그러다 개가 자연사하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통곡한다.

주인공의 감정 불순(不順)은 동물을 향할 때 온전한 주기를 되찾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은 동물적이다.

마침 개 치료를 부탁하러 찾아갔던 동물병원의 여수의사 마리아도 ‘내가 짐승이라는 것을 잊을 바엔 차라리 나를 창조한 신을 잊겠다’는 문구를 비망록 맨 앞장에 써놓는 사람이다.

나는 여섯살 위인 마리아와 만난 지 30일 만에 열두 차례 간음한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거리를 떠다니는 빨간 풍선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풍선이 터질 경우 지구도 함께 폭발할까봐 두렵다고 나에게 털어놓는다. 나는 혼자서는 간직하기 힘든 비밀을 수줍게 고백하는 마리아가 너무 귀여워 이빨로 찢어발기고 싶다. 또 마리아의 하얀 두 유방 사이의 커피 얼룩 같은 점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닫아버리면 까닭없이 슬퍼진다.

마리아는 31일째 되는 날 도시가스 폭발사고로 머리가 절단되어 숨진다. 소설은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전기톱으로 마리아를 살해했음을 내비친다. 나는 엽기적인 살인마였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내가 마리아를 살해한 근거가 될 만한 단서는 ‘찢어발기고 싶다’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너무 귀여워서’라는 게 이유다. 또 엽기적인 살해 행각에 대한 주인공의 반성은 어디에도 제시되지 않는다.

주인공을 통해 이씨가 말하고 싶었던 짐승스러움은 파괴 본능에까지 충실한 맹목성, 윤리가 발붙일 데 없는 무반성성, 근원을 알 수 없는 야성적인 연민 등인 것 같다.

이씨는 “짐승스러움 자체를 얘기하고 싶었지, 인간적인 것과 비교해 열등한 짐승스러움을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소설집 아홉편의 등장인물 중에는 ‘짐승 같은’예민한 감각을 갖춘 이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초식 동물의 음악’의 ‘나’는 아주 미약한 지진을 감지해 내고, ‘그 침대’의 문영·운영 자매는, 물론 여자들의 발달한 육감 탓이기도 하겠지만 남자의 변심을 동물적으로 눈치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주변을 ‘짐승스러운 이’들이 활개치며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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