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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니 허탈하고 붙어도 고달프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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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새벽 닭이 울 즈음인 오전 5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노량진 공시족’ 백성찬(29·가명)씨는 바쁘게 가방을 챙겼다. 6시 시작되는 새벽 특강(국어)을 듣기 위해서다. 30분 전엔 강의실에 도착해야 한다. 조금만 늦어도 ‘가방줄’(가방이나 소지품으로 좋은 자리를 잡아 주는 것)에 밀리기 일쑤다.

지방대를 졸업한 탓에 가방을 대신 놓아줄 친구도 없다. 2007년 8월 상경한 백씨는 1년째 똑같은 새벽을 보내고 있다. ‘6개월 합격 목표’로 도전장을 냈지만 지난 4월 12일 실시된 9급 국가직 공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 백씨의 마음은 무척 급하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백씨는 처음 9급 공시를 ‘식은 죽 먹기’로 여겼다. 조금만 공부해도 합격할 줄 알았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그가 출사표를 던진 직렬(職列)은 전산직. 시험과목은 국어·한국사·영어·컴퓨터일반·프로그래밍언어론 등 5개다. 컴퓨터일반·프로그래밍언어론은 대학 4년 내내 공부한 덕에 자신만만했다.

한국사는 관심이 많은 영역이었고, 국어·영어는 중·고등학교 시절 곧잘 했던 과목이었다. ‘공시족 필수품’이라는 정보처리기사 자격증도 일찌감치 딴 상태였다. 이 자격증이 있으면 가산점 3%가 붙는다. 가령 100점을 맞으면 103점이 되는 것이다.

백씨가 이번 실패에 충격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0문제 중 29개 틀렸어요. 가산점 포함해서 평균 74점이었죠. 그런데 합격선이 76점이었습니다.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죠.”

7시30분쯤 학원에서 나온 그는 ‘공시생 전용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한 달 23만원짜리 밥이다. 한 끼 2555원인 셈이다. 그나마 돈이 아까워 삼시 세 끼는 꼬박꼬박 챙긴다.

그렇다고 아침식사를 느긋하게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허겁지겁’ 먹는다. 9시부터 9급 종합반 강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새벽 특강 때와 마찬가지로, 30분 전엔 도착해야 한다. 역시 가방줄 탓이다.

“결코 장기수는 안 돼야 할 텐데…”

9급 종합반은 대개 2개월 코스로, 수강료는 35만원 선이다. 시험과목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공시족 대부분이 이를 필수코스로 여긴다. 오전 종합반은 대개 오전 9시 시작해 오후 1시쯤 끝난다.

오후 1시25분. 예상보다 늦게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밝은 표정이 아니다.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피곤한 기색도 역력하다. 수업이 늦게 끝나서일까. 아니다.

백씨는 노량진 공시촌의 오후를 가장 싫어한다. 외로움 때문이다.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고시원에서 오후를 보내는 것은 염증이 난다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했어요. 그런데 떨어지고 나니까 시골 부모님께 독서실비 달라고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고시원에서 그냥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시족은 대개 잠은 고시원에서, 공부는 독서실에서 한다. 경쟁자와 함께 공부하면 능률이 그만큼 오른다는 게 이유다. 외로움을 덜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정확하게 4시간이 지난 오후 6시. 저녁시간이다. 그는 또다시 공시족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년째 같은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보니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럼에도 백씨는 “시장이 반찬 아닙니까”라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다. 공시 준비하려면 이 정도 난관쯤은 이겨내야 한다는 투다.

그래도 백씨는 저녁 이후 시간을 좋아한다. 오후 7~9시까지 5명의 공시족과 함께 스터디(study)를 열기 때문이다. 그는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혼자 공부할 때 놓쳤던 부분을 체크할 수 있는 것도 좋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스터디가 끝난 이후엔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백씨는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를 ‘마감공부’라고 부른다. 조금 피곤하더라도 이때를 잘 보내면 다음 날을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시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입니다. 리듬이 끊기면 끝이죠. 하루 공부 안 하면 그날만 망치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 일은 방황할 수밖에 없죠. 그런 의미에서 마감공부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백씨는 내년 9급 공시에선 합격할 것 같다고 말했다. 2점 차이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하지만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문제가 사람 잡는 게 공시다. 한 문제 때문에 ‘장기수’(오랫동안 공무원 시험 공부하는 수험생)로 전락한 공시족도 수없이 봤다. 공무원이 목표이지만 정작 적성에 맞을지도 걱정이다.

“공시 준비를 하고 있지만 공무원이 꿈은 아닙니다. 지방대 출신이 마지막 잡은 목표입니다. 적성에 맞는지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다만 안정적으로 직장생활 할 수 있고,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공무원이기 때문에 선택했을 뿐입니다.” 백씨는 어쩌면 사회와 담을 쌓은 채 ‘맹목적인 도전’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쓸쓸한 ‘노량진 공시촌’에서 말이다.

“어렵게 공부해 이런 일 해야 하나…”

‘9급 공무원 꿈꾸는 사람들’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장진걸(34)씨는 2001년 48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9급 공시에 합격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공무원 신분을 가졌다는 것, 저로선 꿈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죠.”

장씨는 시보를 거쳐 방배우체국 주임으로 발령됐다. 그의 하루 일과는 늘 오전 8시20분부터 시작됐다. 민원인 방문이 많은 우체국 특성상 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9시부터는 공식업무 시간. 우편업무를 담당한 그는 하루 200명에 달하는 민원인을 상대했다. 그래서 일과가 시작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담배 피울 시간도 없었다. 12시까지 기계적 업무가 계속됐다.

민원인 상담은 물론 우편 정리 작업도 그의 몫이었다. 점심시간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민원인들이 점심을 피해 우체국을 방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점심식사도 맘 놓고 해본 적 없다.

“고작해야 20분 정도, 점심은 그냥 허기를 때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점심시간 후 일과 또한 오전의 판박이다. 민원인은 오전과 비슷한 질문을 늘어놓기 일쑤다. 대개 소포가 왜 배달되지 않았느냐, 외국에 소포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식이다. 조금만 불친절해도 고래고래 소리부터 지르는 민원인이 있는 것도 오전과 똑같다. 지겹지만 불만을 가질 겨를조차 없다.

오후 6시 공식업무가 끝났다. 그렇다고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오후 7시까지 우편업무를 종료해야 한다. 일일보고서 작성 등 마감업무도 이때부터 시작이다. 짬을 내 저녁식사를 해야 할 정도다. 오후 9시가 돼서야 장씨를 비롯한 우체국 사람들이 퇴근길에 오른다.

“공무원들이 놀고 먹는다고요? 아닙니다. 하위직 공무원, 특히 민원인과 직접 상대해야 하는 9급 공무원의 하루는 정신없습니다. 게다가 기계적, 반복적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도 심하죠. 9급 공무원이라면 누구든 ‘어렵게 공부해서 이런 일 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장씨는 공직생활 2년 만에 사표를 던졌다. 무엇보다 반복적 업무가 진절머리 났다. 창의적 기획을 할 수 없는 9급 공무원 생활에도 환멸을 느꼈다. ‘8급, 7급으로 진급해도 내가 생각했던 공무원 생활은 못 하겠구나’하는 한계도 몸소 느꼈다.

공무원만 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지만 정작 자기만족, 업무 성취감은 바닥을 쳤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장씨는 공직을 떠난 후 학원강사 생활을 했다. 미래가 보장돼 있는 공무원 신분을 버리고, 신분보장이 가장 약하다는 학원강사를 선택한 것이다.

공시족이 보기엔 ‘배부른’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다르다. 직업적 안정성은 떨어졌지만 성취감이나 업무 만족도는 월등하게 높다는 게 장씨의 말이다.

“공무원을 한다는 것, 정말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하위직일 경우는 더욱 그렇죠. 기계적, 반복적 업무에 익숙해져야 하고, 적은 월급에도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만 공무원이 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9급 공시에 도전하기 전 과연 적성에 맞는지, 하위직 공무원들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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