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꼭 끝장을 봐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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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총선이 끝난 지 일주일째다. 두 가지 주목할 사항이 진행 중이다. 하나는 탄핵 정국이 그대로 진행형이고, 또 하나는 검찰이 지난 대선 때 정당이 사용했던 불법자금 사용 내역을 출구 조사하겠다는 돌출 사안이다. 이미 한나라당 의원 두세명이 대선자금 유용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리라는 소리도 들린다. 대통령 탄핵 여부는 헌재에서 심리 중이니 법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고 불법 선거자금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엄정 수사하는 게 원칙이고 법치다. 그러나 정치적 대결로 비롯된 탄핵소추가 꼭 헌재 결정으로 끝장나야 할 만큼 정치력이 없는가. 지난 대선자금 수사 결과로 정치판이 가위 천지개벽한 상황이 된 지금 국민이 새로 선택한 정치판도를 또다시 검찰이 뒤흔드는 게 옳은 일인가.

*** 새 정치, 새 국정 모양새 갖춰야

헌재 결정이 언제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사실상 유고상태가 43일째다. 뭔가 대책이 있다면 그 공백을 최대한 줄여야 하고 총선 이후 새 정치 새 국정의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노당 권영길 대표의 '선 대통령 사과 후 국회 철회'방식을 재론할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선자금 입구 수사를 했으니 출구 수사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 현실에서 볼 때 차떼기 대선자금으로 국민적 심판을 받으면서 한 시대를 청산하는 대청소를 했다면 이젠 됐다는 정치적 선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수사 대상이 한나라당에 치우칠 때 새로운 형태의 정치 수사라는 비난을 어떻게 면할 것인가.

우리는 법리적 이상에 묶여 정치적 현실을 외면하는 위선 또는 허위의식에 젖어 있는 게 아닌가. 대통령도 탄핵받을 수 있다. 실제적 법률적 절차를 거쳐 헌법재판소가 가동 중이니 그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는 법치 지상주의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민 70% 이상이 탄핵은 잘못됐다고 보고 있고 총선에서 그것이 거듭 확인됐다. 당초 탄핵은 법리적 이상에서 출발했다기보다 정치적 공세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법리적 해결에 앞서 정치적 해결이 가능하다면 외면할 것이 아니라 적극 수용할 자세를 보여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정치는 상생이다. '선 사과 후 철회'의 절충방식은 상생의 정치를 여는 단초가 될 수 있다. 탄핵 심판은 대통령, 여야, 그리고 국민 어느 쪽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리한 대통령 탄핵소추는 모두에게 패배를 안겨준다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선례가 있다. 우리 경우도 이미 법치와 민의라는 두 갈래 길에서 민의를 따르자니 법치가 울고 법치를 따르자니 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혼란상황이다. 이 와중에서 헌재 결정을 둘러싸고 치열한 탄핵.반탄핵의 공방이 재연될 것이다. 이런 갈등을 꼭 겪어야만 하나. 대통령 탄핵 결정도 가공할 후폭풍을 몰고 오겠지만 탄핵 기각이라 해서 대통령 또한 온전치 못할 것이다. 비록 탄핵을 면했다지만 재판과정에서 입은 상처는 깊고도 오래갈 것이다. 탄핵 결정이라 해서 야당의 승리인가. 그런 결정이 나올 경우 민의와 법의 심판 간에서 생겨나는 파국적 상황은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갈 것이다. 반면 탄핵 기각의 경우 야당은 두번 죽는 확인사살을 당할 뿐이다.

정치와 법체계, 국민 모두를 시험에 들게 한 탄핵 정국의 총체적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의도했든 안했든 탄핵 정국이라는 벼랑 끝 정치를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잘못이다.

*** 대통령이 먼저 국민에게 사과를

설령 탄핵에서 풀려나더라도 盧대통령은 탄핵 원죄에서 풀려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먼저 이런 점을 통틀어 국민 앞에 사과하고 국회가 정치적으로 이를 풀어갈 단서를 열어야 한다. 그리고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같은 사례는 과거의 일로 돌리고 구시대 사면과 새 시대 상생의 정치를 열겠다는 대화합 선언을 해야 한다. 16대 국회가 남은 회기 동안 탄핵결의안을 철회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책임질 몫이다.

미국과 비 미국 국가 대표 골프선수들이 격년제로 자존심을 건 대회전을 치른다. 지난해 대회는 비 미국측 어니 엘스와 미국측 타이거 우즈의 막판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3회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해는 저물고 있었다. 내일 다시 속개할 것인가. 일몰 무승부로 끝낼 것인가. 미국측 주장 잭 니클로스와 비 미국측 주장 게리 플레이어는 결론을 냈다. 무승부!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언제까지 상생 아닌 상극의 정치로 갈 것인가.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