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파워 승리 … 민주화 낙관은 일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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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 사임은 또 다른 ‘피플 파워(People Power)’의 승리다. 1999년 10월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후 철권통치로 일관한 지 8년10개월 만이다. 올 2월 총선에서 야당에 참패한 이후 계속된 사임압력을 군에 의존해 버텨 왔던 그가 반 년 만에 국민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은 8년 전 민주화 시대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집권연정의 화합과 군부의 향배가 아직 미지수로 남아 낙관만 할 수는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다시 테러와 반목이 판치는 정정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군의 태도가 가장 큰 변수=무샤라프의 사퇴로 파키스탄은 민주화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군이 아직 명백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상황은 유보적이다. 핵탄두 60기를 보유한 파키스탄 군은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이다. 현재 군의 실력자 대부분이 무샤라프 측근이다. 지난해 11월 무샤라프로부터 군의 통치권을 넘겨받은 아쉬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참모총장은 무샤라프의 핵심 참모였다. 카야니 총장이 취임 직후 군의 단합과 정치권과의 화합을 주창해 무력보다는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치가 군 전체 위상에 위협이 될 경우 개입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에서 수차례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카야니 총장은 일단 무샤라프와 함께 친미파로 구분된다. 따라서 친미 외교정책을 펴온 무샤라프의 퇴진으로 파키스탄 정정이 혼란으로 치달을 경우 군의 정치 개입 빌미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 파키스탄 정치분석가인 탈라트 마수드 박사는 “카야니 장군이 군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직은 무샤라프의 영향력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수준이어서 여전히 파키스탄 민주화의 최대 변수는 군”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나 “만약 카야니 장군이 중심을 잡고 군을 설득해 민주화를 추진한다면 파키스탄은 남아시아 최고의 민주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호기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질적인 정파 분열=연립정권의 분열과 부패 문제도 민주화의 걸림돌이다. 파키스탄의 경우 부토 가문과 샤리프 전 총리 가문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가문이 전체 부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특히 대부분 명문가의 부패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샤라프는 1999년 쿠데타 직후 당시 샤리프 총리 정권에 대한 부패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항간에 떠돌던 총리의 수백억원 대 뇌물수수가 모두 사실이었고 이를 빌미로 샤리프 총리를 해외로 추방했다. 민주화 상징으로 여겨진 부토 여사 역시 부패스캔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그의 남편인 자르다리 파키스탄인민당(PPP) 당수는 몇 년 전 한 지방 지주의 저택을 강제로 헐값에 팔도록 압력까지 행사한 사실이 드러나 정치권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현재 연립정부를 꾸리고 있는 PPP와 파키스탄무슬림리그(PML-N) 등 4개 정당의 분열 조짐도 문제다. 당장 차기 대통령직을 놓고 분열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PPP의 경우 최대 의석(113석)을 가진 만큼 후임 대통령을 당에서 임명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PML-N은 무샤라프 쿠데타 당시 총리였던 샤리프가 헌정질서 회복 차원에서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파키스탄 헌법은 대통령 유고 시 상원의장이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고 있으며 차기 대통령은 유고 30일 내에 4개 주 의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선출토록 규정하고 있다. 임기는 5년이며 대통령은 군 통치권과 의회해산권, 법관임면권을 갖고 있다.

군에 대한 연립정당 간 시각도 제각각이다. 제1당이 된 PPP는 군을 정치의 한 집단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인 반면 제2당 PML-N은 군부와 여당을 척결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 군소정당 간 끊임없는 대립도 문제다.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정당과 이익집단이 많은 나라다. 크고 작은 정당만 100개가 넘는다. 지난 2월 총선에서 무려 25개 정당에서 후보를 냈을 정도다. 이익집단은 수천 개를 헤아린다. 지난해에만 종교와 지역, 그리고 가문 간 이견 대립으로 크고 작은 테러만 700여 건이 일어났다. 이 밖에 70%에 가까운 문맹률에, 개인소득 800달러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경제환경 등이 파키스탄 민주화 앞의 걸림돌로 분석되고 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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