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배트맨 ‘스타워즈’보다 높이 날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절대악 조커 역할을 맡아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히스 레저.


새로운 배트맨과 섬뜩한 악당 조커의 위력이 할리우드 영화의 미국내 흥행사를 다시 썼다. 배트맨 시리즈의 최신작 ‘다크 나이트’(원제 The Dark Knigt)가 17일(현지시간) ‘스타워즈’(1977년)를 제치고 역대 미국 흥행 2위에 올라섰다. 이날까지 미국 내 흥행수입은 4억7000만 달러(약 4900억원)로 제작비(1억8000만 달러)의 2.5배가 넘는다. 

‘다크 나이트’는 지난달 18일 미국 개봉 첫날 수입부터 역대 흥행 신기록 행진을 시작했다. 첫주말 성적 역시 역대 최고였고, 1억 달러부터 4억 달러까지 차례로 역대 최단시간에 돌파했다.

‘다크 나이트’는 흥행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수퍼히어로물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가 대개 현실의 고민을 잊게 해주는 유쾌한 오락물이었던 것과 달리 ‘다크 나이트’에는 고전문학에 비견될 만큼 선과 악에 대한 묵직한 철학적 비유가 가득하다.

이런 비유는 나아가 2001년 9·11테러 이후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미국사회가 겪은 도적적 혼란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예컨대 정의와 싸우는 영웅인 배트맨이 악당 조커를 경찰의 묵인하에 취조실에서 마구 구타하는가 하면, 조커의 음모를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의 휴대전화를 불법으로 감시·감청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과연 당신은 이를 용납할 수 있는지 미국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빌리지 보이스)라는 식의 해석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해석도 나온다. 보수파로 알려진 추리소설 작가 앤드루 클래반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을 통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한 부시 대통령의 도덕적 용기를 지지하고 칭찬하는 영화”라고 주장했다. 비난을 감수하고 악당과 싸운다는 점에서 배트맨과 부시 대통령을 닮은꼴로 보는 시각이다.

이변이 없는 한 ‘다크 나이트’는 내년 2월의 아카데미상에서도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배우 히스 레저의 연기에는 개봉 직후부터 남우주연상감이라는 상찬이 쏟아졌다. 올 초 28세로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는 이 영화에서 절대악 조커 역할을 맡아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 만일 수상한다면, 아카데미 역사상 두번째로 사후에 남우주연상을 받는 사례가 된다.

이제 ‘다크 나이트’보다 미국 내 흥행성적이 앞선 영화는 역대 1위인 ‘타이타닉’(97년)뿐이다. ‘타이타닉’은 미국에서만 6억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전 세계 흥행성적도 역대 1위다. 미국 수입을 포함, 총 18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처럼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대개 해외에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리지만, 배트맨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미국에서 더 많은 흥행수입을 냈다. ‘다크 나이트’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설령 미국 내 흥행에서 ‘타이타닉’을 앞지른다 해도 전 세계 수입으로는 크게 못 미칠 전망이다.

물론 이는 모두 물가변동을 감안하지 않은 절대비교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미국 내 사상 최고의 흥행작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39년)다. 미국의 흥행집계 사이트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약 70년 전 이 영화가 거둔 흥행수입(약 2억 달러)은 요즘 가치로 14억 달러가 넘는다.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이 같은 조정치로는 ‘타이타닉’이 역대 6위, ‘다크 나이트’는 39위다.

‘다크 나이트’의 흥행을 두고 최근 미국의 경기침체와 관련 짓는 시각도 있다. 대공황시대에 그랬듯, 고유가와 불황에 시달리는 요즘 미국인들이 가장 값싸고 손쉬운 오락으로 영화관을 즐겨 찾는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인터넷·DVD 등의 영향으로 최근 미국의 극장관객 수는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극장수입은 전년보다 1.3%, 관객 수는 4%가 줄었다. 이런 와중에 ‘다크 나이트’가 이처럼 놀라운 흥행성적을 올렸으니, 배트맨은 적어도 할리우드를 구하는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이후남 기자

▶ 중앙일보 라이프스타일 섹션 '레인보우' 홈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