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할배, 그라모 힘들다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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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댕!!! 종이 울리자 그동안 숨죽였던 학교가 웅성웅성 활기를 띤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분수는 시원스레 물을 뿜어 올리고 스피커에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17개월 된 딸아이는 교문 앞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몸을 으쓱거린다.

봄이면 한번씩 들르는 친정 나들이다. 친정에는 부모님과 오빠 내외, 조카가 함께 살고 있다. 이번 봄에는 둘째 조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게 되었고, 수업을 마칠 시간에 맞춰 마중간다는 새언니를 따라 이렇게 교문에서 조카를 기다리고 있다. 교문 앞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이 이제 갓 입학한 꼬맹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르르… 병아리 떼처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몰려나오고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조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오늘은 뭘 배웠니?" "수업은 재미있었니?" 등등 종알거리며 딸아이를 안고 조카.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데 조금 가파른 작은 둔덕을 넘어야 할 때였다.

딸아이를 다시 곧추 안고 걸어가는데, 옆에서 함께 가던 할아버지와 손자 아이의 대화가 무심코 귀에 들어왔다.

"할배, 이제 내 데리러 이래 나오지 마라!"

순간 나는 멈칫하며 소리나는 옆쪽을 쳐다봤다.

"와, 내가 이래 니 마중나오는 기 부끄럽나?"

일흔이 조금 넘은 듯한 반백의 할아버지는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손자를 태우고 구릉을 걸어 넘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수 만들었음 직한 낡은 자전거의 뒷자리는 방석을 깔고 발판까지 단단히 동여매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단단해 보였다. 그 뒷자리에 앉은 꼬마는 조카와 같은 1학년 입학생인 듯했다.

"그기 아이고, 할배가 내 데리러 맨날 이래 오믄 이 둔디 오를 때마다 힘들다카이."

나도 모르게 가슴 졸이고 있던 나는 순간 온몸의 힘이 쭈욱 빠지는 것 같았다. 함께 걷던 언니를 쳐다보니 마찬가지로 얼굴 가득 잔잔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할아버지의 얼굴은 대견한 손자에 대한 기쁨으로 화알짝 펴지고 있었다.

둔덕에 올라선 할아버지는 낡은 자전거에 올라타고 손자와 함께 우리를 앞질러 내달렸다. 둘의 대화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아래로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보며 단단한 할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대견한 그 손자의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홍혜정 (33세.서울시 중랑구 신내2동 신내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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