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풍경] 80청춘! 서울대의 '영원한 감독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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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농구부 감독을 맡은 지 40년이 다 돼가지만 장갑진옹은 여태껏 헹가래를 받아본 적이 없다. 한번도 우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노감독을 위해 부원들이 특별히 헹가래 선물을 선사했다. 비록 아무 경기도 없었던 서울대 대운동장에서였지만 말이다.

▶ "어, 이렇게 기합을 준 적이 없는데…." 자율적인 훈련이야말로 서울대 농구부의 자랑이라는 장갑진옹.

"야, 이 녀석아. 패스는 가슴 높이로 해야지!"

신입생들을 맞아 방과 후 연습이 한창인 서울대 농구부. 패스를 주고받던 중 한명이 공을 놓치자 백발 성성한 노인 감독의 호통이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린다. 순간 20명 가까운 농구부원 전체가 움찔한다.

호통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서울대 농구부의 '영원한' 감독 장갑진(80)옹. 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히 알 순 없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감독직을 맡아 해왔으니 벌써 40년이 다 되어 간다.

그가 농구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면서다. 학창시절부터 유독 농구를 좋아했던 그는 친구들 몇 명과 의기투합해 농구부를 창설했다. 1m76㎝로 당시로선 장신이었던 그가 팀의 센터를 맡았었다.

"평균 신장은 작았지만 그때 우리 실력은 지금과 비교해도 손색없었어.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어느 대학팀과 원정시합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니까. 그러다 전쟁이 나는 통에 무산됐지만…."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자 그는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가 2개월여의 교육을 받고는 곧장 장교로 전장에 투입됐다. 휴전 후 군에 계속 남아 있는 동안도 그의 농구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당시 육군에 체육팀이라고는 축구팀밖에 없는 것을 보고 상관들을 설득해 농구팀을 만들기로 했다. 현재 장충체육관 자리에 있던 육군체육관 옆에 야외 농구장을 만든 뒤 전국 각 부대에 연락해 농구 좀 했다는 병사들을 모아 팀을 이뤘다. 그 뒤 해군.공군에 있던 농구팀과 합쳐졌고 이것이 현재 상무 농구팀으로 이어졌다는 게 장옹의 설명이다.

제대 후 서울로 돌아왔지만 다시 학교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학업을 중단한 채 중.고등학교 수업 교보재를 만드는 사업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보다 더 큰 아쉬움이 있었다. 자신이 창설한 서울대 농구부의 명맥이 끊어진 것이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든 60년대 중반, 그는 당시 창립 멤버들의 지원을 받아 농구부 되살리기에 나섰다.

시큰둥한 대학 관계자들을 꾸준히 설득해 농구부 재건 승인을 받아내고 자신이 감독직을 맡았지만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누가 체육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했겠어? 죄다 내 돈 들여 공 사고 애들 밥 사 먹이고 그랬지."

게다가 캠퍼스 안에는 제대로 된 농구코트도 없었다. 시합이 임박하면 다른 대학교 체육관을 전전하며 연습을 해야만 했다. 이런 시련은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강산이 네번 변하는 동안 1000명이 넘는 제자가 그를 거쳐갔다. 현재 중.고 농구연맹 전무이사인 경복고 김승기 교사 등 체육계와 교육계 등에서 많은 제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가 누구냐고 묻자 장옹은 대뜸 "저 놈"이라며 한 부원을 가리킨다. 조금 전 공을 놓쳐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그 학생이다. 생김 생김이 장옹과 비슷해 '혹시'하고 물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자란다. 서울대 체육교육과 새내기인 기현(19)군. 올 초 입학하자마자 농구부에 가입해 할아버지 감독님 밑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의 아버지 일준(49)씨도 장옹의 제자였다. 현재 중학교 체육 선생님인 장씨는 같은 과 75학번으로 역시 부친 밑에서 4년간 가드로 뛰었다. 그러니 3대가 모두 농구부원인 셈이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지.덕.체 중에 '체'의 중요성을 강조했지. 한번도 진로를 강요한 적 없었는데 아들.손자 모두가 내 뒤를 따르게 된 건 그런 영향 아닌가 싶어."

아들이 제자로 들어왔을 때도 그랬듯 가족이라 해서 봐주는 법이 절대 없다고 했다. 여느 신입부원과 다름없이 연습 전 코트에 걸레질을 하고 농구공 등 장비를 챙기는 것 모두 장군의 몫이다. 선수 기용이나 포지션 배치 등도 절대 '특혜'를 기대할 수 없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도 철학이 바로 '단합'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만 가지고는 별 쓸모가 없지만 뭉쳤을 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법"이라고 틈만 나면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그래서 아무리 중요한 시합이라도 부원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과 기회를 준다고 한다. 스타 플레이어 한두 명 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게 훨씬 효과적일 텐데도 줄기차게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해 왔다. 학생들이 농구부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잘난 한명'보다 '단합된 여럿'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고픈 마음에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울대 농구부는 연전연패다. 최근 공식 경기에서 이긴 적이 언제냐는 질문에 선수들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이렇게 승리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순수 아마추어팀이라는 자부심 때문이다. 따라서 부원들이 연습을 핑계로 수업에 빠지는 것은 장옹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된 연습 때문에 다음날 수업시간에 졸 수밖에 없다는 학생들의 투정도 장옹 앞에선 부질없는 핑계일 뿐이다.

그래도 주말만큼은 절대 훈련계획을 잡지 않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학창시절인데 농구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경험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란다. 80년대 중반부터 일본 도쿄(東京)대 농구부와 정기 친선경기를 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다. 도쿄대 역시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스카우트하지 않은 아마추어 선수들로 농구팀을 운영하고 있다. 2년에 한번씩 서로의 대학을 방문해 시합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서울대 팀이 도쿄로 갈 차례다. 현재까지 어느 팀 전적이 더 좋으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다 "친선경기에 그런 게 뭐 중요하냐"고 얼버무린다. 아마 이 경기에서도 그다지 좋은 성적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 그에게 배우는 학생들과 장옹은 무려 60살 가까운 나이차가 난다. 분명 세대차이도 느낄 법 하다. 그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이제 겨우 인생 8학년에 들어섰을 뿐인데 무슨 소리냐"며 다시 한번 호통이다.

요즘도 가끔씩 부원들과 학교 앞 녹두거리에 나가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인다는 장옹. "아직도 얘네들 아무나하고 팔씨름을 해도 이길 자신 있다"는 너스레에서 변치 않는 젊음이 느껴졌다.

글=김필규 기자<phil9@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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