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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장환의 니하오 베이징]박태환 ‘8년 대계’ 세워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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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24면

신나고 즐거운 일주일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 첫날인 9일, 유도의 최민호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최민호의 첫 금메달. 그것도 5게임 연속 한판승이었다. ‘한판승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이원희로부터 빼앗아 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완벽한 금메달이었다.

한국이 개막 첫날에 금메달을 딴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16년 만이다. 그때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여고생 여갑순이 깜짝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이어지는 금메달 소식. 양궁장에서, 수영장에서, 사격장에서, 역도장에서 5일 연속 금메달이 쏟아졌다. 한국의 올림픽 출전 사상 초반에 이렇게 성적이 좋은 적은 없었다.

초반에는 미국을 제치고 종합 2위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고, 14일까지만 해도 3위를 지키고 있었다. 순위표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대회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여갑순이었고, 마지막 금메달의 주인공은 마라톤의 황영조였다. 이번에도 최민호가 스타트를 잘 끊었으니, 대회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에서 이봉주 선수가 금메달을 따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선수가 기쁨과 감동을 선사했으나 한국 선수단 최고의 스타는 역시 수영의 박태환이다. 한국의 수영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는 것은 우리 세대에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인 줄 알았다. 8명이 겨루는 결승에만 진출해도 ‘대성공’이었다.

10년 전쯤 당시 대한수영연맹 회장이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앞으로 10년 후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쯤 딸 수 있도록 장기 투자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담당 기자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하나’ 하고 아예 기사를 몰고한 기억이 있다. “올림픽 금메달이 무슨 애들 장난이냐. 10년 아니라 20년을 투자해도 수영 금메달은 힘들다. 그냥 회장이 립서비스한 말을 기사화하는 것 자체가 독자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내 눈앞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환호하면서도 동시에 믿어지지 않는 현실. 마치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에 2-1로 역전승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이탈리아를 이기다니.”

물론 올림픽 금메달은 수영연맹이 장기 투자한 결실이라기보다 박태환이라는 걸출한 ‘명품’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 대한민국 최연소 대표선수로 출전했으나 부정 출발로 뛰어 보지도 못하고 물 밖으로 나와야 했던 15세 소년. 그가 4년 만에 미국·호주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을 연거푸 석권할 정도로 급성장한 것이다.

이제 19세의 대학 1년생. 그의 앞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놓여 있다. 4년 후에는 미국 마이클 펠프스의 아성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자유형 400m 금메달에 이어 200m에서 펠프스에 이어 은메달. 그러나 자신의 주종목인 1500m에서는 예선 탈락했다. 이 대목에서 ‘주 종목’의 의미를 바꿔야 할 때가 됐다. 분명히 박태환은 1500m가 자신의 주 종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발휘한 400m와 200m가 주 종목이다. 1500m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

200m와 1500m를 같이 한다는 것은 육상으로 치면 400m와 마라톤을 함께 뛴다는 것과 비슷하다. 단거리와 장거리는 연습 방법에서부터 경기 운영 방법까지 다 다르다. 더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한다.한국 수영은 이번에 금1, 은1개라는 사상 초유의 성적을 거뒀지만 박태환과 다른 한국 선수의 격차는 크다. 박태환 외에는 결선에 올라간 선수조차 없다.

박태환의 등장으로 한국 수영은 좋은 기회를 잡았다. 박태환은 앞으로 최소한 8년은 더 뛸 수 있다. 그렇다면 수영연맹은 ‘8년 대계’를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박태환이 선두에서 끌어 주는 동안 수영 저변을 넓히고 꿈나무들을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물론 계획은 있을 것이다. 투자와 실행이 따라야 한다. 박태환에 만족할 수 없다.

박태환이 1500m 예선에서 탈락하자 벌써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자만하고 있다가는 중국의 장린에게도 잡힐 수 있다는. 천진난만한 미소와 준수한 용모, 뛰어난 실력에 겸손함까지 갖춘 박태환은 분명 ‘아름다운 청년’이다. 박태환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오래 빛을 발하려면 주변에서 흔들지 말아야 한다. 보물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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