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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외엔 묘수 없어, 욕먹더라도 할 건 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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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03면

신동인기자

우리 국민의 노후자금 230조원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국민연금공단 박해춘 이사장. 그는 ‘코뿔소’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서울보증보험과 LG카드, 우리은행 등 부실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저돌적인 구조조정으로 경영을 단번에 정상화시킨 파워 덕분이었다. 그런 코뿔소의 코가 요즘 쑥 빠져 있었다. 잔뜩 뿔도 나 있었다. 지난 6월 초 이사장 취임 때 보여줬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달랐다.

국민 불안한데, 주식 비중 왜 늘리나…박해춘 국민연금 이사장 직격 인터뷰

그는 “괴롭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과 언론이 오해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비중을 2012년까지 2배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밝힌 7월 말 기자 간담회 이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14일 찾은 서울 잠실 국민연금 빌딩 정문 옆에는 현수막들이 어지럽게 나부끼고 있었다.
“국민 노후자금 투기자본화 반대한다”는 내용으로 민주노총이 내건 것이었다. 그래도 코뿔소의 뿔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인터뷰 도중 그는 “정치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했다. 좌고우면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금융 전문가로서 국민에 봉사하려 한다. 죽을 각오로 소신껏 일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식 투자 비중 확대가 정답”
-왜 주식 늘리기에 그리 집착하는가. 반대 여론도 만만찮은데.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주식 비중 확대는 이미 내가 오기 전에 결정돼 있던 사안이다. 중장기 기금운용계획을 보라. 2012년까지 주식비중을 30% 이상으로 높인다고 돼 있다.”

-그런데 왜 40%를 제시했나.
“주식 확대는 나의 소신과 일치한다. 계획은 30% ‘이상’인데 40% 선까지 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국민연금기금이 고갈의 위기에 처할 것이란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조금 더 거두고, 덜 주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 결국 주식에 투자해 수익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나도 욕 안 먹고 편히 자리만 지키다 가면 그만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주식 비중 높이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확산되는 데 안타까워했고, 또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앞길이 뻔히 보이는데 가만있을 순 없다. 그것은 나에게 직무유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200년간 미국의 주식과 채권의 연평균 수익률을 조사해 보니 주식이 채권보다 3.3%포인트 높았다고 했다. 한국은 과거 20년간 주식과 채권 수익률이 같았지만, 최근 5년만 보면 주식이 채권보다 4배 높은 수익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국민의 불안을 헤아려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한 얘기다. 준비를 하고 있다. 위험 관리 시스템을 철저히 갖추는 것이다. 지금은 기금본부에서 사람의 직감으로 위험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월급을 일반 금융회사보다 덜 주다 보니 직원들의 자질도 떨어진다. 선진국 연기금들의 사례를 연구해 최첨단의 시스템을 구축하겠다. 이를 위해 정부에 30억원의 예산을 요청했다. 이게 완비되지 않으면 주식 비중을 1%도 늘리지 않겠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겠다”
-최근의 비판적 여론에는 박 이사장의 강성 이미지도 불리하게 작용한 것 같다. 국민연금은 구조조정 대상의 부실 금융회사가 아니다. 과거와 같은 밀어붙이기식 리더십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 않겠나.
“나는 정치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조직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어느 CEO나 해야 할 일이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연금을 개혁하라고 나를 선택한 것 아닌가. 개혁이란 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안 된다. 조직에 끊임없이 긴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나는 욕먹을 각오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다가 자리를 내놓으라면 내놓겠다.”

박 이사장은 “과거 CEO를 맡았던 금융회사의 직원들을 지금 만나면 ‘당시에는 괴로웠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조직이 달라지고 성과가 좋아졌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그의 리더십에 대해 추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은행장 시절 임원회의에 지각한 임원을 문밖에 한 시간 이상 세워 놓은 게 금융계에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그렇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줄 필요는 없지 않았나.
“사실 의도적으로 그랬다. 은행에 가보니 임원이나 본부장들이 말로만 고객을 섬긴다고 하면서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의 기를 꺾기 위해 일부러 벌을 준 것이다. 파급 효과는 좋았다. 국민연금에 와서도 팀장 인사를 파격적으로 하니 조직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

운용 챙길 권한 있다”
다시 기금 운용과 관련한 얘기로 돌아왔다.
이사장이 전임자들과 달리 기금운용에 너무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금운용본부의 전문가들에게 일임하는 게 맞지 않나.
“법에 따르면 이사장은 기금 운용 업무를 포함한 공단업무를 총괄 지휘·감독하게 돼 있다. 지금까지 역대 이사장들은 공무원 출신의 비전문가들이어서 기금 운용을 챙기지 못했을 따름이다. 나는 금융전문가다. 우리은행(자산 240조원)에서 국민연금보다 큰 자산을 관리해 봤다. 나는 맡겨진 직분에 충실할 것이다.”

-기금운용본부가 2010년 기금공사로 분리해 떨어져 나가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나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선진국들도 보면 기금공사 독립 뒤 초기엔 운용수익률이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간다.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현재 연 6%대인 수익률을 8%대까지 높여 운용기능을 넘겨주겠다.”


“나는 거꾸로 생각한다.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열리고 있다. 서브프라임 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이 그렇고 앞으로 중국에도 큰 장이 열릴 것이다. 우량 해외자산을 싼 값에 사들일 호기를 맞고 있다. 국내 은행 및 한국투자공사(KIC) 등과 손잡고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갈 생각이다. 급팽창하는 기금 규모에 비추어 국내 시장은 너무 좁다.”

“민영화 기업 지분 인수하겠다”
-국민연금은 민영화 대상인 공기업 주식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렇다. 하이닉스와 대우조선, 현대건설, 우리금융, 산업은행 등 모든 민영화 대상 기업의 지분 인수에 참여할 계획이다. 다만 직접 경영에 참여하기보다는 재무적 투자자로서 투자이익을 챙길 것이다. 이들 기업은 국민의 도움으로 생존했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주식을 사면 그 이익이 저절로 국민에게 환원되는 셈이다.”

-주식을 보유한 기업에 대한 주주권 행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미주알 고주알 나설 생각은 없다. 방어적으로 하겠다. 다만 경영진이 과연 회사를 잘 이끌고 있는지 평소 철저히 들여다보겠다. 그래서 팀 단위의 관련 조직도 만들었다. 주주로서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면 아주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장기 투자자다. 단기 성과와 배당보다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주목한다. 기업의 미래지향적 투자와 친환경 경영, 사회공헌 활동 등을 응원할 것이다.”

박 이사장은 “국민연금 이사장에 응모할 때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고 털어놨다. 계약한 연봉이 9200만원으로 은행장 때의 10분의 1로 줄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34년 금융인 생활을 공공부문에서 마무리하면서 국가에 봉사하고 싶었다고 했다. “큰일을 하려면 이미지 관리도 중요하다”고 하자 “조언에 감사한다. 사실은 나도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앞으로 부드러워지도록 노력하겠다”며 기자를 배웅했다.


박해춘(60) 이사장은
충남 금산 출신으로 대전고와 연세대 수학과를 나왔다. 국제화재를 거쳐 삼성화재 마케팅 상무를 지내다 외환위기 직후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에게 발탁돼 부실에 빠진 서울보증보험 사장으로 긴급 투입됐다. 구조조정 능력을 인정받아 이후 LG카드 사장과 우리은행장을 맡았다. 국내 최초로 보험·카드·은행의 CEO를 아우르는 ‘트리플 크라운’의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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