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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진짜와 가짜 구별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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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화분 하나가 빛깔이 선명하고 싱싱해서 가짜처럼 보였다. 이파리에 손톱을 대고 꾹 눌러보았다. 이파리가 손톱 자국만큼 찢어졌고 살짝 즙이 나왔다. 진짜라는 걸 알게 됐다. 진짜 생명에다 손톱을 눌러 기어이 상처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쓸모없는 의심을, 그럴 때면 자책하게 된다. 호기심이 많은 데다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번번이 같은 순간에 같은 행동을 하고 만다. 그때마다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생생한 꽃일수록 슬쩍 한 귀퉁이를/손톱으로 상처 내본다 가짜를 사랑하긴/싫다 어디든 손톱을 대본다(김경미, ‘생화’)”.

조화(造花)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된 탓도 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시든 느낌까지 내기 때문에 눈으로 보아서는 조화인지 생화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이렇듯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쓸모없는 일을 중요하게 여길 때가 더러 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내가 유독 예민해지는 분야는 식당이다. 목포집·순천집·전주집·강릉집…. 순천집에서는 더더욱 엄정해진다. 우리 엄마가 순천 사람이어서, 엄마 맛과 비교를 해보면 안다. 음식 맛이 맛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순천집에서는 순천 맛이 나야 하고, 강릉집에서는 강릉 맛이 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식당은 가짜다.

누구는 명품의 진위를 가려내는 데 더 소질이 있기도 하고, 누구는 직업의 전문성을 가려내는 데 더 예리해지기도 한다지만, 내 경우는 음식의 출생지에 까탈을 부린다.

그런데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데 유독 아둔한 분야가 있다. 사람의 마음. 특히 칭찬 같은 달콤한 말들. 나는 의심의 꼬리를 고양이처럼 세운다. 의심의 강도만큼 내가 무턱대고 속고 있음을 안다. 사람을 쉽게 믿는 천성 탓에, 사람을 요리조리 관찰하고 분석하는 걸 꺼려하는 성격 탓에, 나는 상처난 고양이처럼 웅크릴 때가 있다. 칭찬을 잘하는 사람 앞에선 더 심하다.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는 열등감 때문인지, 칭찬에 중독되어 교만해질까 두려운 것인지, 그 칭찬에 넘어가고 나면 어떤 함정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 모두가 이유일 수 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겪고 나서야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그 사람이 진짜였는지 깨닫곤 한다. 변치 않는다는 것이 나에겐 사람 마음을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인 셈이다.

진짜 생화는 완벽에 가까울수록 조화처럼 보인다. 어느 시인은 시들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평생 조화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나는 그 시인이 어이없고 엉뚱하다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변치 않았을 때 진짜라 여겨온 나 같은 사람도 아마 다른 사람에겐 엉뚱할 수 있으리라. 진짜 생화가 시듦으로써 진짜임을 입증하듯, 사람 마음도 그와 같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겠다.

완벽히 이해받던 행복한 순간들에 왜 나는 번번이 손톱을 세워 꾹 눌러왔을까. 내 손톱 자국에도 불구하고 상처 없이 시듦 없이, 그 마음이 거뜬히 버텨주길 무슨 배짱으로 감히 원해왔을까. 어느덧 사람의 마음은 조화를 만드는 기술보다 더 진화됐다. 진짜든 가짜든 손톱이 가닿는 자리에 상처가 생긴다. 생즙이 눈물처럼 배어 나오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 나 또한 그런 식으로 가짜 상처를 위시하곤 한다. 눈물겨운 것은 가짜건 진짜건, 가책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화’라는 시를 마저 읽는다.

“햇빛들 목련꽃만큼씩 떨어지는 날 당신이 손톱 열 개/똑똑 발톱 열 개마저 깎아준다/가끔씩 입으로 거친 결을 적셔 주면서/신에게 사과했다.”

속지 않겠다고 상처를 내왔던 나의 손톱을 이제는 똑똑 깎고 싶어진다. 이 시에서처럼 당신이 손톱 열 개와 발톱 열 개를 똑똑 깎아준다면 더 좋겠다. 그리고 입으로 거친 결을 적셔준다면. 아니, 이제는 손톱이 아니라 음식 맛을 감별하는 데 자신이 있는 나의 혀로 그 거친 결을 적시고 싶다.

천운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