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다시 황영조를 뛰게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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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孫基禎).남승룡(南昇龍)선수가 1,3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올린지 올해로 꼭 60년째다.이들이 본선에 진출하기까지 나라없는 백성이 겪어야 했던 피눈물 나는 설움이 있었다.올림픽 참가 선수를 뽑는 최종 예선에 서 1위 남승룡,2위 손기정,3위 스즈키,4위 시오아키였다.그때나 지금이나 올림픽 참가선수는 3명으로 제한돼 있으니 당연히 본선 진출은 3위까지였어야 했다.그러나 일본 육상연맹은 조선 선수중 1명의 본선진출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4명 을 함께 베를린에 보내면서 막판 컨디션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올림픽 개막 며칠을 앞둔 날 코치는 4명의 후보선수에게 최종선발 레이스를 시킨다.베를린 시내 그뤼네 발트 공원 25㎞를 주파하는 코스였다.南선수 앞을 달리던 시오아키가 갑자기 샛길 골목으로 접어들어 골인 지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분기탱천한 南선수가 사투를 벌여 결국은 시오아키를 따라잡고 孫선수와 1,2위를 차지한 다음 시오아키에 주먹을 날려 그를 쓰러뜨린다.
동아마라톤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황영조를 포함해 4명의 선수를 올림픽에 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문득 60년전 이 에피소드를 떠올렸다.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뀐 오늘이지만 4명의 후보를 낸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결정 이었다고 생각했다.바로 직후 황영조는 은퇴성명을 했다.원칙과 규칙을 준수하는 선수로서 응당 내렸어야 마땅할 선택이었다.몬주익의 영웅답게 그의 은퇴 성명은 더욱 돋보였다.물러날 줄 모르는 노욕(老慾)의 정치인들 모습과 비교해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우리에겐 미련이 남는다.국민적 영웅으로 길이 남아야 할 황영조가 올림픽 문앞에서 물러난다는 게 너무나 아쉽다.마라토너는 마라토너일 뿐이다.한때의 역부족과 불운으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었다해서 마라토너로서 그의 일생을 마감한 다는 것은 아쉬움을 넘어선 회한(悔恨)으로 남는다.그의 나이 26세면 마라토너로서는 한창 뛸 수 있는 절정기다.전문가들은 아직도 황영조가 최고의 마라토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나는 그가 동아마라톤에서 왜 맨발로 운동화를 신고 뛰었는지 그게 안타깝다.전문가들 이야기로는 한참 뛰고 나면 발이 평소보다 몇㎝ 늘어난다고 한다.그래서 꼭 끼는 운동화를 신지 않고 느슨한 것을 택한다고 한다.그 수축을 조절하는 게 면양말인데 이걸 황영조는 벗어던지고 맨발로 뛰었으니 발바닥이 터지는 불운을 겪은 것이다.그의 체력이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니라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큰 시련을 부른 것이다.황영조가 다시 뛰게끔 우리는 힘을 모아줘야 한다.은퇴성명을 낸지 이미 보름이 지났다.
보름의 휴식이란 운동선수에겐 치명적이다.애틀랜타가 아니면 어떠냐.9월 베를린,11월 뉴욕대회에 이어 내년4월이면 보스턴을 비롯한 국제대회가 줄지어 황영조를 기다리고 있다.이 경기들을 위해 다시 황영조는 운 동화 끈을 매고 훈련에 들어가야 한다.
몬주익의 영웅이 된 직후 황영조는 『나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외쳤다.그의 꿈은 큰 태극기를 휘날리며 씩씩한 모습으로경기장을 한바퀴 도는 것이었다.그러나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그는 테이프를 끊은 직후 실신해 버려 그 꿈을 이 루지 못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그는 다시 경기장에 나서야 한다.
황영조는 국민적 영웅이다.이 젊은 영웅이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퇴장한다면 그것은 국민적 좌절이 된다.한국 음악을 대표한다 할 젊은 지휘자 정명훈이 바스티유 음악감독에서 해임되었을때 우리는 너무나 아쉬웠다.그렇다고 정명훈이 음 악을 버리지는않았다.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다고 황영조가 마라톤을 버리는 것은 정명훈이 바스티유 음악감독에서 해임되었다고 음악계를 은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부당하다.
우리의 자원은 인력이다.그중에서도 가장 경쟁력있고 국제성이 높으며 한국의 명성을 떨치는 최고의 상품성을 자랑하는 게 황영조다.황영조의 은퇴는 국력 손실이며 국가 경쟁력의 사장(死藏)이다.이런 그의 은퇴를 손놓고 바라만 볼 것인가.
다시 황영조가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그가 말하는 지옥같은훈련을 시작할 수 있게끔 모두가 나서서 권하고 독려해야 한다.
은퇴가 아름답다고 치켜세울 게 아니라 그의 꿈을 실현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자존심을 국민 모두에게 심어주는 또 한번의 도전을 우리는 황영조와 함께 다시 시작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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