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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추미애 민주당 의원 인터뷰 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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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이후 당시의 정통야당이었던 구 민주당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 민주당의 잔다르크라 불리던 추미애 의원이 눈물의 삼보일배로 총선에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민심은 냉담했다. 추 의원도 민주당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4년, 통합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18대 총선, 민주당 대표 경선 등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며 추미애 의원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최근 참석한 촛불집회에서 일부 시민들이 ‘탄핵녀’로 지칭하며 보였던 거부반응처럼, 그녀가 당시 ‘탄핵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여전히 큰 짐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추미애 의원에게서 당시의 상황과 민주당의 진로, 또 유력 차기 주자로서의 꿈과 고민은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들어보기로 했다.
때문에 이번 인터뷰는 정치인 추미애의 내공과 그릇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 하고, 독자들에게는 그녀의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 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 인터뷰는 한 줌의 의미도 없다.


1. 영남의 딸에서

대구에서 가난한 세탁소집 딸로 태어난 추미애 의원의 이린 시절 꿈은 법관이나, 기자, 연극배우가 되는 것 이었다. 어쩌면 정치가는 이 세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진 직업 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지금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것일까?

Q . 보수적인 대구문화에서 여학생의 서울 유학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서울로 간 것은 본인 선택입니까? 더구나 어려운 집안환경에서 서울의 사립대학 진학은 무리가 아니었습니까? (추의원은 한양대 법대를 졸업했다)
- 경북여고 3 학년 때 한양대에서 지방 우수학생 유치단이 왔었어요. 그때 한양대를 지원하면 4년간 전액장학금과 생활비까지 지원해 준다고 해서 서약서를 썼죠. 어차피 대학은 혼자 힘으로 마칠 생각이었거든요.

Q. 원래 학창시절부터 리더십에 관심이 있었나요?
-전혀 아니에요. 저는 좋은 친구들을 추천하는 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제가 나서서 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그때는 어머니가 삵바느질 까지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곤궁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정치적 견해가 있으신 분이셔서 아마도 그 영향은 좀 받았을지 몰라요.

Q. 부친이 정치인이 되기를 바라셨나요?
- 그건 아니지만, 아버지가 좀 철학적인 분 이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딸인 제게 대망. 삼국지 같은 책을 읽히셨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제가 책을 읽을 때는 일부러 TV를 켜곤 하셨어요. ‘좋은 환경에서 누구나 못하겠나, 어떤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키워야 살아남는다’고 하시면서요.

Q. 학창 시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 우리집이 대구에서도 아주 낙후된 동네였어요, 집에서 나와서 차를 타는 데만 30분씩 걸어야 할 정도였죠. 그때 걸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죠. ‘긍정적 전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가지려고 애를 썼어요. 딸 아이가 얼마 전에 시크릿이라는 책을 선물하더군요. 그 책에도 뭘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원하는 것에 계속 주파수를 보내면 언젠가 현실이 된다고 하더군요. 바로 그때 제 상황이 그랬죠.

Q. 추미애 의원을 얘기하려면 부군이신 서성환 변호사를 빼고 얘기 할 수가 없는데요, 학창시절 두 분의 남다른 연애 스토리도 그렇고요.
- 남편은 법대 동기였어요. 하지만 나이가 저보다 세 살이 많아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수술을 스무 차례나 받는 바람에 학교가 늦었거든요. 하지만 존재감이 크고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대학 입학 후에도 사고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좋으면 학교에 나오고, 나쁘면 못나오곤 했지만, 리더십이 있어서 동기들이 많이 따랐었어요.


Q. 서 변호사는 당시에 법학연구회를 만들어서 유신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서변호사가 단순한 부부 이상으로, 추의원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두 분은 어떤 관계입니까?
- 맞아요, 학생시절에는 정신적 지주, 지금은 동지적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처음 눈을 뜨게 해준 인도자이기도 했고요. 학생시절에 남편이 안락사를 주제로 한 모의재판을 기획했었어요. 한양대에서는 처음이었죠. 그때 선후배들을 모두 건사하면서 원만하게 잘 이끌어 나갔죠. 그때 제게도 재판에 참여하라고 하더군요. 그때 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 후 많은 시간을 함께 했죠.

Q. 두 분의 결혼에는 우여 곡절이 많았죠? 이미 사법고시를 패스한 대구출신 추의원과 여전히 고시준비생이었던 정읍출신 남편이 결합하는데 집안의 반대도 만만찮았다는 데요.
- 해인사에서 사시공부를 할 때, 남편이 시를 한편 보냈어요. 그 시를 보고 갑자기 그가 확 다가왔어요. 그때 결혼을 결심한 거죠. 당연히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었죠. 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데다, 말씀대로 남편은 아직 고시준비생이었으니, 그 당시로는 쉽게 허락을 받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 문제는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갔죠.

Q. 법관 시절에 꽤나 골치 아픈 판사로 알려졌었다는 데요?
- 82년에 전두환 정권시절에 춘천지법에 있었어요. 당시에는 시국사건 재판을 하면 정보과 형사가 법정에 입회하는 게 당연한 걸로 받아 들여질 때였죠. 한번은 매번 나타나는 형사에게 ‘당신 누구냐?’ 하고 물었더니, 피식 웃으면서 ‘정보과 형사’라는거에요. 그 순간 ‘당장 여기서 나가라’라고 했죠. 그랬더니 문제 판사로 여겨졌어요. 그 후에도 영장전담 판사를 할 때 압수수색영장이 청구되었는데, 누구나 읽고 있던 학술서적들을 불온서적으로 압수수색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기각했더니 한밤에 경찰 서장이 전화를 해서 고압적으로 따지더군요. 그래서 조목조목 기각이유를 설명하고 거절했더니, 다음날 윗분이 절 부르시더군요. ‘아버지 같은 경찰서장에게 왜 대들었느냐고요’. 어이가 없었어요. 결국 영장은 재청구 되었고 다른 판사에 의해 발부되었죠. 제가 문제 판사로 여겨졌다면 아마 그런 일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Q. 소위 의식 있는 판사로서의 당시의 고뇌는 어떤 것이었죠?
- 그 당시는 시국사건에 대해서는 일본말로 소위 ‘미나이데’ 판결, 즉 보지도 않고 판결하는 관행이 있었어요. 검사가 주문한 대로, 피고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하는 판결이죠. 그것이 관행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가능하면 들어주려고 했어요. 젊은 양심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판결했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법률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재량이었죠. 법관은 법에 따라 판결하는 건데 법이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도리가 없었죠. 그래서 최소한 무변론 판결만이라도 하지 말자고 주장했어요. 그 과정에서 시대에 대한 고민이 가슴속에 차 올랐죠.

Q. 그 ‘시대의 고민’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대로는 안되겠다. 내가 나서서 바꾸자. 뭐 이런 거였나요?
- 보통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하죠. 그러나 문제는 그 판결문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적혀졌을 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생기는 거에요. 하지만 당시의 법은 통치자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기계적인 법이었어요. 사법부는 시대의 양심으로 절규한 사람들을 법이라는 도구로 기계적으로 재단하면서 ‘우리는 판결로 말했다’고 스스로를 자위 했던 거죠. 저는 판사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할 때만 판결로서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고민의 실체였죠.

Q. 당시로는 드문 여성판사로서 적당히 묻어갈 수는 없었나요?
- 아버지는 법관이 된 제게 늘 남의 입장이 되어보라고 하시더군요. 판사가 보기에 가벼운 사건도 다른 사건에 비해서 가벼운 것이지, 당사자에게는 결정적인 사건이잖아요. 누군가의 운명의 길을 바꿀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재판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재판은 늘 고민해야 하고, 판결로 말할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시대상황이 그렇게 될 수가 없도록 만드니 어쩔 수가 없었죠. 판사로서 저는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이죠.


2. 호남의 며느리로

Q.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정치입문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때 DJ 가 왜 추의원을 지목했다고 생각하세요? 영남출신 여성판사라는 점이 이유가 된 건가요?
- 그 이유는 제가 모르죠. 다만 나중에 당시 광주고법 부장판사께서 저를 추천하셨다고 들었어요. 늘 시대에 대한 고민만 하다가 시대상황 자체에 던져진 셈이죠. 그 상황에서 ‘도와달라. 참여해 달라’고 하시는데 거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이왕 할거라면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여해서 시대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비판만 하다가 요청을 받고서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방관자가 되는 건데, 그럴 수는 없었던 거죠.

Q. 결국 법복을 벗고 국민회의 공천을 받았는데, 왜 전국구를 마다하고 굳이 지역구를 택했습니까? 더구나 첫 여성 부대변인도 여성이라는 게 이유라면 실수한 거라고 말했다는데요.

- 제가 공직에 근무하면서 여성이어서 개인 사정을 봐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럴 수도 없었고요. 아이 셋을 출산하면서 항상 마지막 날까지 근무했어요. 여자라고 봐 달라면 ‘여자는 다 그래’ 할 것 아닙니까. ‘여자의 한계야’ 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했어요. 선구적 여성으로서 내가 흐트러지면 여성이라는 존재가 위축되죠. 여성에게 맡겨도 해낸다는 것, 그건 후배 여성들에 대한 책임이기도 했죠. 물론 아직 임명직에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만 저는 임명직에 도전한 게 아니잖아요. 경쟁의 무대에 서면서 영남출신이라고, 여성판사라고,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또 받아도 안 되는 것 이었죠.

Q. 그 말씀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역설적인 자격지심으로 들리는데요?
- 천만에요. 여성은 사랑을 잉태하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사랑을 열매 맺게 하고 양육하는 존재죠. 이건 중요한 경험이에요. 그건 사람이 인간으로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각성의 단계’에요. 남자는 절대 경험 불가능한 세계죠. 나 아닌 다른 생명을 통해 이해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여성의 그런 소중한 경험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가 있어 왔어요. 그래서 여성은 항상 뛰어넘어야 할 ‘내’가 존재하죠. 보호색 없이요. 그래서 여성 프리미엄을 안 받겠다고 한 것이죠.


3. 민주당의 잔다르크

Q. 구 민주당이 분당될 당시에 사수파에 속했는데요, 구 민주당 세력을 포용하면서 굳이 민주당 잔류를 결정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지금까지 말씀하신 소신과는 약간 어긋나는 것 같은데요.
- 저는 노무현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뛴 사람이었어요. 당시 선거운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하나는 노사모를 중심으로 한 사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참여운동본부와 같은 공조직이었죠. 저는 거기서 본부장을 맡아서 공조직에서 뛰었죠. 한데 노 후보의 지지율이 낮고 회복 기미가 없으니까, 시니어들을 중심으로 후보를 단일화하자는 소위 후단협이 만들어졌죠. 그 바람에 처음에는 삐끗했지만 나중에는 그 분들도 다들 열심히 뛰었어요.

Q. 당시 조순형·박상천·정균환·한화갑 전의원 같은 분들과 정치적 코드가 맞았나요? 그 말씀은 그분들과 정치적 견해가 일치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 정권 재창출의 당위는 모두에게 일치된 목표였어요. 하지만 제게 중요한 것은 ‘분열 없는 통합’이었어요. 한데 선거가 끝나자 신당을 만들면서 분열된 거죠. 제가 정치에 처음 뛰어들 때, 세력이 약한 ‘정통 야당 세력’을 호남이 보호해주는 것을 보고 국민회의에 뛰어 들었어요. 호남이 영남출신 노무현 후보를 광주경선에서 1위를 만들어 준 그 마음도 아마 그 때와 같은 것 이었을 거에요. 그것은 지역성이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해서 지켜온 정통야당을 차마 분열시킬 수 없었어요. 아마 그게 이유라면 이유였죠.

Q. 당을 분열 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 2003년 말에 열린우리당 창당이 가시화 되었어요. 저는 마지막까지 분당이 아닌 개혁을 주장했어요.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을 개혁하면 되잖아요. 그러지 않고, 누구와는 도저히 개혁을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분열주의적 발상이죠. 제가 분열에 반대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민주당의 ‘적자성’을 지키고, ‘정통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야 민주세력이 명분상 우위에 서는 거라고 믿었던 거죠. 하지만 결국 갈라졌죠. 지금 보세요. 다시 합쳐졌잖아요. 그런데 분당해 나간 대통령이 자꾸 민주당을 부정하는 발언을 계속하니까, 민주당의 시니어 그룹들은 도저히 안 되겠다, 탄핵해야겠다고 하더군요.

Q. 백 번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추의원이 탄핵에까지 찬성 할 명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 분당 후, 저는 민주당이 사는 길은 개혁성에서 열린우리당보다 앞서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러자 당에서 조순형의원에게는 대표를 하고, 저는 야당최초의 여성원내 대표를 맡으라고 제안하더군요. 그때 제가 ‘지금이 그럴 때냐, 전당대회를 열어서 당원들의 자존심을 살리고, 개혁의지를 보여줘야 할 때다. 우리끼리 나눠먹기로 결정 할 일이 아니다’고 거절했죠. 결국 전당대회를 했고 조 대표가 1등 제가 2등을 해서 최고위원이 되었어요. 그런데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자 조대표가 탄핵으로 가자고 계속 설득을 하더군요.

Q. 그럼 추 의원께서 조순형 대표의 설득에 넘어가신 건가요?
- 고민스러웠죠. 개인의 소신과 당의 최고위원으로서의 입장이 상충된 거죠. 그래서 노대통령에게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다’는 발언을 사과하면 탄핵을 철회시키겠다고 제안했어요. 하지만 거부했어요. 그때부터 선택의 폭이 좁아졌죠. 당의 2인자가 이 상황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배신자가 되는 거죠. 그리고 결국 탄핵안이 제출되었어요.

Q. 이정일 전의원은 조순형 대표가 탄핵에 찬성하지 않으면 공천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던데 혹시 그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까?
- 3 월의 어느 눈 내리는 날 이었어요. 조대표가 탄핵에 동의하지 않은 6명중에서 5명에게 공천을 주지 않겠다고 압박을 한 건 사실이에요. 물론 제게는 못 그랬죠. 결국 저만 남은 거죠. 그때 조 대표에게 ‘시대의 양심이 되십시오’ 라고 탄핵 불가론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제게 공천협박을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어요.

Q.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것이 DJ 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었느냐고도 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 김 전대통령은 ‘분단시대의 정치적 의미’를 유일하게 말씀하신 분이시죠. 시대의 아픔을 같이 아파한 분이기도 하고요. 더구나 그것을 개인의 아픔으로 그치지 않고 승화한 분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성과는 김 전 대통령의 것이지, 민주당의 것이 아니에요. 저는 사람 설득의 가장 큰 원리는 ‘소신에 뿌리한 건강성’ 이라고 믿어요. 저는 단지 민주당이 복원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었지, DJ 의 입장을 고려한 것은 전혀 아니었어요. 정치를 하는 것이 권력욕이나 출세지향 때문이라면 잘못 된 일이듯, 정치적 판단도 마찬가지인 거죠.

Q. 어쨌거나 결국 탄핵에 참여한 모양새가 되었고, 그 후 추의원은 삼보일배를 통해서 탄핵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탄핵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측면도 있지 않나요?
- 이유야 어떠하던 국민을 불편하게 해드렸으니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통령이란 국정을 상징하는 ‘헌법 기관’이에요. 한데 그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헌법의 수호자’가 아닌 ‘정치인 노무현’을 자처했어요. 스스로 밑으로 내려온 거죠.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심판자는 국민이죠. 비록 대통령이 그랬어도 국민의 입장에서 법익은 탄핵보다는 ‘헌정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 이었죠. 민주당은 그런 국민의 판단을 거역했고요.

Q. 그런데 왜 혼자서 그렇게 삼보일배를 하면서까지 사과를 하셨나요? 혹시 ‘나는 억울하다’ 뭐 이런 심정이셨나요?
- 탄핵 이후 총선국면에서 민심이 표출되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후보들이 지지율에서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여론조사 결과가 심각해졌어요. 저는 그럴수록 개혁에 더 박차를 가하고, 개혁성에서 앞서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론조사결과를 보고는 모두들 자기 지역구로 도망치다시피 해버렸어요. 국민의 분노가 엄청났었죠. 당사에 사람이 없었어요. 당장 자신들이 떨어지게 생겼으니까요. 우리 지역구도 마찬가지였지만, 저까지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당의 선대 위원장을 맡았고 그 역할에 충실했던 거죠.

Q. 그 바람에 ‘삼보일배’가 추의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 나중에 ‘그때 갈등하는 인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하셨죠? ‘갈등하는 인간’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나요?
- 절을 하면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 국민들께 잘못을 했는데, 남아 있는 세력을 용서해 달라고 마음으로 빌었어요. 절을 하면서 이마가 땅에 닿는데. 깨진 유리조각들이 눈 앞에 보이더군요. 그 순간 이것이 지금 민주당의 모습이다 싶어서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삼보일배를 끝내고 나니까, 불가에서 말하는 ‘경계 없음’이라는 딱 그 느낌이 갑자기 확 들더군요. 마음이 넓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말은 아마 그런 의미로 한 말 일거에요.

Q. 원래는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잔다르크에서, 그때부터 위기에 빠진 민주당을 구하는 추다르크로 불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것이 지금의 강성 이미지를 만드는데 기여하기도 했는데, 추다르크 이미지가 정치적으로 마이너스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 당시 저를 그렇게 부른 것에는 강한 야당에 대한 기대치가 숨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강한 야당의 당당한 리더쉽에 대한 지지자들의 갈증의 표현이라고 받아 들였어요. 오히려 늘 마음에 새기고 있죠.

Q. 나중에 열린우리당이 위기에 빠지자 노대통령이 장관직을 제의 했다던데요, 사실입니까?
- 사실이에요. 하지만 거절했죠. 정치인은 민주세력 전체의 이해를 아울러야 하고, 나의 이해를 반영하면 안되죠. 정치인의 책무는 넓은 포지셔닝을 가져가는 것이고, 계파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Q. 노대통령 당선 후 분당반대, 그리고 대북특검과, 대연정, 이라크 파병 등에 반대했고, 한미 FTA등에도 최초로 문제를 제기하는 등 늘 대립각을 세우셨는데요. 그럼에도 나중에 열린우리당과의 재통합에는 참여하셨잖습니까?
-정치인은 이미지보다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정치인의 괘적은 족적과 같은 것이라서 긴 과정 속에 이미지가 표출되는 거죠. 급조 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척박한 야당에서 출발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에 몸을 던졌어요. 옳은 일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정치인은 판단을 쌓아가는 거죠. 대통합은 애초에 갈라지지 말았어야 할 원래의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는 당위였어요.

(법관 출신이어서 일까. 마치 잘 정리된 판결문을 읽듯 논리정연하고 말에 거침이 없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의외다 싶을 만큼 부드러운 표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카메라를 향해 제대로 크게 웃어주지 않아 권혁재 기자가 애를 먹는 모습이 역력했다.)


4. 돌아와 거울 앞에서

Q. 곤경에 빠진 통합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손학규 대표를 얼굴로 내세웠는데요.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정치란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죠. 때문에 인물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인물을 통해서 대중을 흡수하는 것이죠. 이제는 그런 사고를 할 때가 되었어요. 저는 손 대표에 대해서는 미워한 적도 없고 인간 개개인에 대한 배제도 주장한 적은 없어요. 다만 손대표가 스스로 민주당을 선택 한 것이면 환영하지만, 그것이 아닌 경우, 즉 정치 환경이 유인한 것이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손대표가 입당해서 교황선출 방식으로 대표가 되기를 원했어요. 정치인은 말을 하면 지켜야 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국민과 당원동지들에게 약속을 해야 합니다. 국민과 당원들에게 당당하게 ‘내게 기대를 가지라’고 하면서 지지를 요청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안 했어요. 그게 생략되었어요.

Q. 어쨌건 재통합후의 민주당이 치른 18대 총선 결과는 참패였다고들 하는데요. 총선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패배였죠. 지지세력에게는 항상 지지의 이유를 드려야 하는데 그걸 드리지 못했어요. 대표적으로 과거 노 전대통령의 ‘대 연정제안’ 같은 것 때문이죠. 민주당 지지세력의 특성은 명분을 중시하는 것 인데, 그런 제안이 지지할 명분을 흔들어 버린 것 이죠. 그런데도 아직도 그걸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국민들은 향수나 추억으로 투표하지 않아요, 미래를 보고 투표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늘 말하는 ‘과거에 민주화를 이루어 낸 세력’이라는 얘기는 미래 얘기가 아니잖아요. 결국 미래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패배의 뼈아픈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Q. 그럼 그 당시 외부인사가 다수가 된 공천심사위원회가 지역구 공천을 좌우한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비정상이었죠. 당이 그 만큼 어려웠다는 반증이지만, 저는 솔직히 심사 전 날 긴장했었어요. 심사위원들 중 상당수가 비정치인들이었으니까요.

(당시 공천심사장에서 추미애 의원이 곤혹스런 질문에도 불구하고, 워낙 당당하게 답변하고 나가자, 공심위원장이었던 박재승 변호사를 비롯한 외부 공심위원들로부터 ‘대단한 소신이다’ ‘민주당 후보를 통틀어서 가장 강단이 있다’라는 평들이 쏟아졌었다.)

Q. 요즘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습니다. 과거 추의원께서는 대북 송금특검에 강하게 반대했는데, 대북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 남북관계는 긴장보다는 공존교류와 화해가 중요합니다. 노 전대통령이 이제는 그 기조를 아무도 되돌릴 수 없게 비가역적으로 만들어 놨어야 하는데, 오히려 대북특검을 통해 원점으로 되돌려 버렸어요. 국민의 정부에서 이룬 평화를 노 전대통령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의 평화의 단계로 끌고 가지 못한 거죠. 정말 잘 할 수 있었는데 아쉽죠.

(추 의원은 2005년 헤리티지 재단에서 공부하면서, 그곳에서 경수로 등 북의 평화적 핵이용권 인정과 초기에 대한 보상을 처음으로 거론했고, 그것은 후에 9.19 공동선언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Q.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출마의 변으로 ‘조직과 계파로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사람들이 민주당의 위기의 실체다’고 말했는데, 이번 전당대회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 민주당은 앞으로도 수시로 우리가 어떤 당이었나, 갈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미래진로 설정을 위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성에 대한 확인이 먼저 필요한 것 입니다. 건강한 주도세력들이 그런 고민들을 수렴하고, 끌어 갈 때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고요. 그 점에서 이번 전대 결과는 아쉽다고 볼 수 있어요.

Q. 영남의 딸, 호남의 며느리라는 추미애 의원의 독특한 입지를 두고, 일각에서는 ‘영남의 가출한 딸’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신데요?
- 영남은 예전에는 권력을 비판하는데 날카로운 감시자의 역할을 자임했었어요. 역사를 보더라도 조선시대 사림이 그랬고요. 그 뿌리를 길게 보면 영남은 권력에 편승하거나, 덕을 보려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앞으로도 영남이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고향에 가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들 사랑하고 이해해 주시죠.

Q. 공천심사 당시에 추미애 의원의 성격이 워낙 불 같아서 주변에 보좌관이나 심지어 운전기사까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루머가 제보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 글쎄요. 제가 워낙 많이 움직이고 일을 많이 하니까. 업무량이 적지 않죠. 그래서 일이 힘들면 그만 두시는 분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만약 그런 소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 불찰이겠지만, 저로서는 그런 루머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추미애 의원이 17대 총선에 떨어진 다음, 함께했던 보좌관들의 퇴직금을 정치자금으로 지급했다가 추 의원의 회계책임을 맡았던 서 변호사가 정치자금법위반으로 기소되는 일이 있었다. 물론 법원에서는 무죄판결이 났다. 그 점에 비추어보면 이 부분은 적어도 음해나 과장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한편으로 정치인 추미애에게 적지 않은 적이 있음을 시사하는 하나의 반증일 수도 있다.)

Q. 2001년 이문열씨와 ‘곡학아세’ 논쟁이 붙었을 때, ‘기득권층에 영합하는 야만적 지식인’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 개인이건 집단이건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기성찰과 반성이 중요하죠. 하지만 이것이 잘 안될 때는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성역 없는 지식인의 비판이 필요해요. 더구나 대중성을 갖는 지식인의 경우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 할 때 그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죠. 그 점을 지적한 겁니다.

( 2001년 7월 이문열씨의 칼럼을 두고 추미애 의원이 ‘곡학아세(曲學阿世)’로 비판하자, 이문열씨는 단장취의(斷章取義)의 혐의가 짙은 망발이라고 반박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후, 이문열씨는 ‘추 의원이 정치를 잘못 배웠다’고 공격하고, 추 의원은 ‘이씨야 말로 문학을 제대로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응수하면서 2차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추 의원의 말 실수가 기사화 되면서, 추 의원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사태까지 이어졌었다.)

Q. 야당의원으로서 지금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 하십니까?
-사실 저는 처음부터 대운하 같은 것은 산업화 세력의 발상이라고 지적했고, 그런 발상으로는 우리경제를 이끌어 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명박 정부의 핵심정책인 감세정책은 철 지난 미국 정책을 모방한 데 불과합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감세정책이 검증된 성과는 없이 양극화만 조장한다는 비판과 반성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죠. 그런 정책은 대안이 될 수 없어요.

Q. 마지막으로 정치인 추미애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저는 부잣집 딸이건, 가난한집 아들이건 누구나 똑같이 출발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수동적이고 시혜적 의미의 복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그런 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그게 제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마치며

추미애 의원은 과거의 거침없는 언사와 달리 내내 정제된 답변을 했다. 높아진 그의 위상 때문일까. 정치인을 상대로 한 인터뷰에서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기에 세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추미애 의원은 최근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 빅5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민주당 소속으로서는 손학규 전대표와 추미애 의원 두 사람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최근 민주당 대표경선에서는 현저한 격차로 2위에 머물러야 했다. 추 의원의 강점이자 약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강하고 뚜렷한 소신을 가졌지만 타협에 능숙하지 않은 강성 이미지를 가진 탓이다.

얼마 전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 추 의원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날 추미애의 눈물은 힐러리의 그것처럼 ‘미필적 고의’였을까. 아니면 앞서 그녀의 말처럼 강함 뒤에 감추어진 따뜻한 모성의 ‘승화된 눈물’이었을까. 앞으로 정치인 추미애의 성공은 바로 이 점이 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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