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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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블레즈 파스칼.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요,물리학자요,종교철학자. 그는 열두살 때 기하학(幾何學)을 혼자 힘으로 정립했다 한다.열여섯살 땐 그 기하학을 토대삼아 『원추곡선론(圓錐曲線論)』이라는 이론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세무 공무원이었던아버지를 위해 계산기를 고안,제작하기도 했다.천재였 다.
파스칼…하면,「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멋지게 갈파한 철학자로만 알아온 아리영에게 아버지가 일러준 지식은 놀랍고도 신선한것이었다.세상엔 더러 이런 천재도 있거니 했다.그 능력에 흥분했다. 아리영은 머리 좋은 남자에게 유달리 끌렸다.강한 성감(性感)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머리 좋은 남자의 성생활은 의외로담백한 것일 수도 있는데 소녀 아리영으로서는 그런 사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함께만 있어도 몸과 마음이 온통 충족될 수 있을것 같았다.
파스칼 같은 남자가 있으면 연애하리라 싶었다.
미스터 조는 그런 때 나타났다.파스칼처럼 종교철학을 전공한다는 데 우선 관심을 가졌고,고학하는 우수 장학생이라는 데 더욱끌렸다. 그러나 이제 곰곰이 돌이켜보면 애당초 미스터 조의 시계(視界)에 아리영은 없었다.그는 분명히 어머니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연하의 청년이 바치는 연모(戀慕)를 물리치면서도 어느 모로는 그것을 즐겼을지도 모른다.미스터 조의 장서를어머니가 내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마녀(魔女)에 대한 유별난 관심도 실은 미스터 조가 심은 것이 아 니던가. 연모의 종착역은 육신의 결합이다.미스터 조가 어머니에게 결합을 호소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잖이 짐작된다.어머니의 처지로 보나 완벽주의 성품으로 보나 그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요구였고,연모의 궤도는 끝이 났을 것이다.
그가 아리영에게 눈뜬 것은 그 후의 일 같다.어머니의 미모를닮은 아리영에게서 그는 「또 하나의 어머니」를 보았을 것이고,자기한테 급격히 접근해오는 아리영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앙갚음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을 테지만 결과는 그렇게 됐다.어머니는 분노하고 증오하며 절망했으리라.
그 미묘한 심리의 무늬를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침대를 각각 쓰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의 일인 듯 짚어진다.
어머니는 그럴수록 아버지에게 정성을 바쳤고,아버지도 그 정성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지 않았으나 그때부터 밤생활이 끊기다시피한 것은 아닌지.
아버지가 정길례여사에게 기울인 강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제부터라도 두 사람을 맺어 줄 수는 없을까.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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