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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원교근공의 한계 보인 그루지야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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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베이징 올림픽의 화려한 개막식으로 중국이 ‘중화(中華)제국’의 부활을 세계에 알렸다면 러시아의 상왕(上王)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은 그루지야에 대한 화끈한 무력 개입으로 러시아 패권주의의 부활을 알렸다.

흑해 연안의 약소국 그루지야가 자국 내 자치공화국인 남(南)오세티야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번 사태는 처음부터 전쟁으로 성립하기 힘든 비대칭 구조였다. 분리독립을 원하는 남오세티야의 배후 세력인 러시아를 상대로 인구 460만의 그루지야가 전쟁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예상대로 러시아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분쟁에 개입해 압도적 무력으로 단박에 그루지야를 박살냈다.

남오세티야에 먼저 공세를 취함으로써 그루지야가 빌미를 제공하긴 했지만 러시아의 대응은 명백히 과도한 것이었다. 새총에 대포로 응수한 격이다. 쏟아져 들어오는 오일머니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회복한 러시아는 이번 사태를 통해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패권국의 지위를 되찾았음을 과시했다. 흑해와 카스피해를 잇는 유라시아의 전략적 요충인 카프카스의 맹주(盟主)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보여줬다.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면 반드시 응징한다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데도 성공했다.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꿈꿔온 푸틴은 러시아의 힘을 과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목표로 내걸고, 노골적인 친미(親美) 노선을 걸어온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푸틴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던 푸틴에게 사카슈빌리는 스스로 걸려든 꼴이 되고말았다.

올해 만 40세인 사카슈빌리는 옛 소련 출신으로는 보기 드문 친미주의자다. 그루지야가 독립한 이듬해인 1992년 미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을 나왔다. 이어 조지 워싱턴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뉴욕에 있는 로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귀국 후 사카슈빌리는 정치엘리트로 승승장구했다. 2003년 부정선거에서 촉발된 민중혁명인 ‘장미혁명’을 이끌어 자신을 발탁한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냈고, 2004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옛 소련 지역에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카프카스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던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사카슈빌리는 환상적인 파트너였다. 그루지야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셋째로 많은 2000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파견했다. 부시는 적극적인 군사원조와 경제지원으로 보답했고, 2005년 그루지야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카슈빌리는 미국의 호의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미국이 그루지야 편을 들어 이번 사태에 적극 개입해줄 것으로 착각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아직 발목이 묶여 있고, 이란 핵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의 협력이 절실한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와의 물리적 충돌 가능성을 무시하고 적극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번 사태에서 미국이 한 일이라고는 공허한 말로 러시아의 자제를 촉구한 것과 이라크 주둔 그루지야 병사에게 귀환 항공편을 제공한 것이 전부다. 벌써 사카슈빌리는 도대체 뭘 믿고 그토록 위험한 도박을 벌였느냐는 안팎의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강자 곁에서 약자가 생존하려면 멀리 있는 다른 강자와 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원리다. 하지만 곁에 있는 강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국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약소국 외교의 철칙이다. 멀리 있는 미국만 믿고, 곁에 있는 러시아에 대들다 그루지야는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둘 다 잃게 생겼다. 사카슈빌리는 실권 위기에 몰렸다. 한·미동맹을 한국 외교의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기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그루지야 사태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