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4자회담'을 다듬어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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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4자회담」은 그 속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느슨한 가방이다.이 속에는 북.미회담도 담을 수 있고 북.일회담도 담을 수있다.물론 남북회담도 집어넣을 수 있다.그런 뜻에서 4자회담은틀이 잡힌 회담양식이 아니라 모든 회담의 길을 터준 한국과 미국의 공통된 의지의 천명이라 생각하면 된다.4자회담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으로 발전해 나갈지 아직 아무도 점칠 수 없다.관계 당사국의 노력과 계획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양을 갖추게 될 것이다.
북한은 당연히 이 회담을 북.미회담으로 변형시켜 나가려 할 것이다.북한은 현재 겪고 있는 심각한 체제위기를 벗어나는 길이오직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라 생각하고 있다.북한은 중국처럼 노동당 1당지배의 전제정치를 유지하면서 경제개혁을 성취해 북한 주도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경제역량을 갖추려 하고 있다.
북한은 경제개혁에 필요한 자금.기술.시장의 확보를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북한이 필요한 것을 줄수 있는 나라는 일본과 미국인데 미국과의 관계개선없이는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엄청나다.지난20년동안 공을 들여왔다.때로는 사정도 했고 때로는 미국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 하겠다고 미국을 위협하기도 했다.핵확산금지조약체제를 허물겠다고 떼쓰기도 했고 휴전선에서 전 쟁위협도 해 왔다.그러나 한국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했다.한국과의 관계개선을 북.미관계 개선의 선행조건으로 못박은 한국의 정책으로 미국이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4자회담은 이 걸림돌을 제거하는 좋은 틀을 북한에 준 셈이다.이 틀 속에서 남북회담을 뒤로 미루고 북.미회담만 밀고 나가면 북한은 원하는 대로 미국과의 단독회담을 할 수 있게 된다.
통일문제와 평화협정문제는 남북한 당사자 원칙을 존중한다는 미국의 성명이 있었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이 조건을 얼마든지 우회할 수 있다고 북한은 생각할 것이다.북.미간 연락사무소 개설문제,휴전선에서 미군과의 충돌이 있을때 이를 수 습하는 문제,북한의 화학무기와 미사일의 제조.배치문제 등을 북.미간에 다룬다면 결국 당사자원칙은 무의미해지게 된다.
미국은 북한의 이러한 의도를 알면서도 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미국으로서는 불이익이 없기 때문이다.미국은 북한을 미국에 의존하게 유도해 미국의 영향아래 넣어 미국이 추구하는 정책에 북한이 방해하지 않게만 할 수 있으면 족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그리고 나아가서 미국은 그 대가로 약간의 경제지원과 북한체면 세워주기에 협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4자회담제안 이후 미국과 북한간의 접촉은 눈에 띄게 늘고 있다.학술회의 명목으로 북한대표들은 미국에 교대로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다.미사일 협상도 계속하고 있고 유해송환협상도 진행하고 있다.
4자회담은 어떤 형태로든지 변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이를 우리의 뜻에 맞게 다듬어 나가야 한다.
한국이 4자회담에 동의한 것은 미국이 남북당사자 원칙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와남북한간 긴장해소,그리고 통일을 위한 여러가지 협의 등은 남북한이 우선 합의한 후 미국등 관련국가가 이를 뒷 받침하는 조치를 취한다고 했다.
4자회담에서 우리는 북.미 회담에 대한 방해를 하지 않기로 양보한 대신에 미국의 「당사자 원칙」지지를 받아낸 셈인데 이것을 더 확실히 굳히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다.
우선 당사자원칙 적용범위를 명확하게 구체화해야 한다.남북한 문제는 따지고 보면 우리의 「국내문제」다.대한민국의 한 지역을점거하고 있는 북한을 우리가 다뤄가는 문제다.이런 정신을 미국이 확실하게 인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이런 정신 에서 당사자원칙을 해석한다면 미국은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 분명해진다.우리의 동의없이 북한과 수교해서는 안되며 전쟁상태를 종결하는 문제는 당연히 한국이 주도하도록 미국이 손을 대서는 안된다.북한에대한 지원도 우리와 협의해야 한다.
4자회담의 핵심은 미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당사자 원칙을 존중하게 만드는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상우 서강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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