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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공기업 체질 걷어내니 망하던 회사 아시아 1위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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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27면

박 사장은 10년 전 막대한 부실을 안고 있던 대한재보험에 구원투수로 투입돼 회사를 아시아 1위인 우량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주역이다. 1963년 정부투자기관으로 설립된 대한재보험은 78년 형식적으로 민영화됐지만 정부가 사장 임명부터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사실상의 공기업이었다. 박 사장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여느 기업인보다 더 철저하게 경영을 혁신해 공기업 때를 말끔히 씻어냈다. 국세청이 마주 보이는 서울 광화문 코리안리 빌딩 11층 사장실에서 박 사장을 만났다.

취임 10년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

-취임 당시 회사 상황이 어땠나.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면서 2800억원의 부실이 생겼다. 설립 이후 36년간 번 돈(823억원)의 세 배를 넘는 금액이었다. 회사 안엔 패배주의가 만연했다. 구조조정을 하려 해도 ‘위에 잘 보이려고 아랫사람들을 희생시키느냐’는 불신이 너무 강했다. 잠을 못 잤다.”

-위기에 빠진 이유가 뭐라고 봤나.
“절대주주가 없는 상태에서 정부가 사실상 인사권을 행사했다. 정부가 3년마다 최고경영자(CEO)를 낙하산으로 내려 보내다 보니 공기업 시절부터 자리 잡은 해바라기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무사안일과 대충주의가 팽배했다. 과장 이상 간부가 평사원보다 많아 조직 구조도 역삼각형이었다. 과장 한 명이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근무하는 부서도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왕따’를 당했다. 한마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도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했다. 비결은.
“인력을 30% 줄였지만 이것을 구조조정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문화를 바꿔야 한다.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듯 기업의 운명은 기업문화가 좌우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신뢰가 필요했다. 감축 대상을 선정할 때 상사뿐만 아니라 동료와 부하 직원들의 평가까지 반영하는 다면평가를 하자고 했다. 일방적인 상의하달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노조도 이를 납득했다. 결과적으로 간부의 절반이 회사를 떠났다.”

-반발이 심했는데도 순환보직을 도입한 이유는.
“수십 년간 채권·선박 등 특정 분야 일만 해 오면서 철옹성을 쌓고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게 문제였다. ‘전문성’이 성역이 돼 있었다.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여러 분야를 겪어 보는 게 새로운 아이디어와 변화에 대한 대응 능력을 키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직원들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효과를 봤다.”

박 사장은 해마다 신입사원들에게 ‘개별 분야가 아니라 재보험의 전문가가 될 것’을 주문한다. 지난 10년간 직원 1인당 생산성이 네 배 이상 오른 데엔 순환보직을 통한 직원들의 시야 확대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전 임직원과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한다고 들었다.
“2004년부터 내년까지 5년에 걸쳐 지리산부터 설악산까지 구간을 완주할 계획이다. 임직원의 몸에 밴 공기업 문화를 벗기고 협동심과 야성을 불어넣으려는 것이다. 지난해엔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2박3일간 태백산 43㎞ 코스를 전 임직원이 완주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땐 축구 면접을 한다. 공을 잘 다루는 사람보다 열심히 뛰고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사람에게 점수를 준다. 과거의 기업 경쟁력이 경험과 관성에서 나왔다면 앞으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좌우한다.”

-기업문화를 바꾸는 과정에서 CEO의 책임도 클 것 같다.
“정부나 힘 있는 실세로부터 인사 청탁이 와도 단호히 거절했다. 더 좋은 자리를 맡아 달라는 제안도 여러 번 뿌리쳤다. CEO가 개인적인 욕심이나 회사 바깥일에 관심을 가지면 누구보다 먼저 임직원이 알아챈다. CEO 개인이 아니라 조직을 위해 일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조직 운영의 핵심인 인사는 어떻게 했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부서별로 돌아가며 모든 직원이 간부회의를 참관하게 하고, 승진 대상자는 부장급 인사위원들이 난상토론을 거쳐 선정하게 했다. 결과에 대해선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다면평가를 통해 숫자로 나타나는 성과뿐만 아니라 의욕과 열의도 함께 봤다. 이전 CEO들이 인기 관리용으로 남발해 온 특진을 10년간 단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는 식의 지시형이 아니라 소통을 바탕으로 수평적 경영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리더가 저돌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올드 스타일이다. 조직 스스로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 줘야 한다. 보고서 몇 장으로 상황을 전달받아선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힘들지만 CEO가 부지런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

백두대간 종주 때 임직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두를 양보하지 않는 박 사장의 모습에 감탄한다고 한다. 평소 골프와 스키 등으로 체력을 다진다지만 육순이 넘은 나이의 그로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종주를 앞두고 남 몰래 러닝머신을 하면서 대비를 한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도 임직원들에게 ‘말발’이 통하는 이유다.

-지난 10년간 경영실적이 꽤 좋았다.
“98년 3%이던 해외 부문의 비중을 지난해 18.3%까지 높인 게 큰 힘이 됐다. 국내 제조업 기반이 약해져 가는 상황에서 해외 진출로 활로를 찾았다. 중국 등 동남아에선 입지를 다졌고, 최근 두바이에 사무소를 내 중동에 진출했다. 일본 도아리를 제치고 아시아 1위 재보험사가 됐다. 세계 28위였던 위상도 12위까지 올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0년 세계 10위, 궁극적으론 5위 내에 드는 게 목표다.”

코리안리는 지난 10년간 연평균 13.4% 성장해 국내 보험사 평균 성장률을 크게 웃돌았다. 지난해엔 3조6000여억원의 수입 보험료와 377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박 사장 취임 당시 액면가(500원) 언저리를 맴돌던 주가는 현재 25배 이상으로 뛰었다.

-성장 속도가 빠르니 불안하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해외에서 손실을 보는 국내 회사들이 부지기수다. 스위스리 등 세계적 재보험사들도 수십억 달러씩 까먹었다.
“기우다. 마음만 먹으면 한 해 20, 30%씩 성장할 수 있었지만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돌다리만 건너왔다. 한 번 망해 본 회사라 임직원 모두 리스크 관리에 철저하다. 지진 등 위험이 큰 상품은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외국계 투자은행으로부터 서브프라임 관련 파생상품을 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위험성이 크고 미국 부동산 시장이 불안해 보여 투자하지 않았다.”

-최근 종합금융그룹으로 도약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는데.
“투자자문사나 국내외 보험사 인수합병(M&A), 인터넷은행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통적인 재보험업만으론 성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국경이 무의미해진 글로벌 시장에선 대형화와 복합화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단일 업종으로 100년 이상 버틴 회사가 없지 않느냐. 금융업 테두리 내에서 상호보완적인 사업을 한다면 단점보다 순기능이 많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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