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서구 미술사에 이름 올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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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헤르포트 미술관이 초대한 이불씨의 ‘사이보그’ 연작은 중성적이고 기계적인 미래의 인간상을 암시한다.

이불(40)씨는 가끔 "이름이 본명이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설치미술가이다 보니 덮고 자는 이불을 예명으로 쓸지도 모른다고 넘겨잡는 이들이 꽤 된다. 외국인도 가끔 묻는다. 영어로 쓴 'Bul'이 황소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서다. 거대하고 몸집 좋은 작품 특성 때문에 더 설득력 있는 지레짐작이다.

이불씨는 요즈음 정말 힘이 세진 느낌으로 살고 있다. 24일 뉴욕 제프리 다이치 갤러리에서 시작하는 개인전에 이어 10월 서울 pkm갤러리, 11월 일본 가나자와 미술관, 12월 호주 시드니 현대미술관까지 대륙을 넘나드는 전시회 준비에 바쁜 그에게 또 다른 초청장이 배달됐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문을 여는 독일 헤르포트 미술관(관장 얀 후트)이 개관기념 '나만의 영웅'전에 유일한 아시아 여성 작가로 그를 뽑았다.

1994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 예술감독으로 유명해진 얀 후트 관장은 20세기 현대미술사에서 거장으로 꼽을 만한 미술가.건축가.디자이너 50여명을 골랐는데 파블로 피카소.파울 클레.앤디 워홀.요제프 보이스.안젤름 키퍼.신디 셔먼과 함께 이불씨가 당당하게 '영웅'자리에 올랐다.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흥분했어요. 시간이 좀 지나니 서늘해지면서 묘해요. 나이 마흔에 제 미술인생에서 큰 매듭 하나를 짓는 기분입니다. 굉장히 학술적인 전시회이기 때문에 인기나 명성과는 다른 성취감을 주거든요. 지난해 프랑스 미술 전문출판사에서 제 화집이 나왔고 서구 현대미술사 책에 작품과 이름이 언급되는 일은 많았지만 그런 것과 다른 사건이라 할 수 있죠. 미술사적 전개의 맥락을 잡아가는 중요 전시회이기에 제 작품이 한국 미술 또는 아시아 미술의 한계와 영역을 뚫고 평가받고 인정받은 셈이죠."

그는 "기분이 괜찮다"고 했다. "겁없이, 타협하지 않고, 10년 앞을 내다보며 자기 비전을 지니고 묵묵히 걸어온 결과"라고 했다. 반짝이로 장식한 생선을 내놓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시에서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까딱이지 않은 뚝심, 거대한 남성 성기 모양으로 부풀어오른 풍선 형상으로 식민주의적 권력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여성주의 시각, 무섭고 기괴해서 미래의 괴물을 연상시키는 '몬스터'와 '사이보그' 연작으로 우리 시대 몸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짚어온 자기 성찰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일에 흥미가 있어요. 나를 뒤집어 엎는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외부에 도전하는 건 싱거워요. 너무 잘 보이고 쉽잖아요. 자기를 전복하는 일은 보장도 유혹도 없고 어렵기만 하지요."

이불씨는 지난 1월 작품하기 알맞은 크기와 형태로 설계한 서울 성북동 새 작업실로 옮겼다. 겉에서 보면 차고나 공장 같은 이 건조한 공간에서 그는 동시에 몇 가지 작품을 진행한다. "머릿속에 악성 벌레가 들어있나 의심스럽다"고 너스레를 떨 만큼 끊임없이 떠오르는 새 작업에 대한 구상으로 그는 쉬지 못한다.

"젊은 작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라는 한마디입니다. 평생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지치지 않고 자기와 싸우는 내공을 쌓으려면 스스로를 가장 냉철하게 쳐다볼 수 있는 자기가 돼야 합니다."

그는 "나는 탐욕스러운 인간인 모양"이라고 웃었다. 작품을 팔아 돈 좀 생기면 어려웠던 때 도와줬던 이들 얼굴보다는 제작비가 없어 접어놨던 작품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한 오기와 냉정이 오늘 세계 미술 속에 'Lee Bul'이라는 이름을 뚜렷하게 새겼다.

글=정재숙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이불씨는=1964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87년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교육제도의 진부함을 견디지 못한 그는 내면의 분노와 에너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미술가로 출발했다. 남근 중심의 시각문화를 비판하고 여성 신체의 본질과 그 억압 구조를 드러내면서 인간 몸의 미래를 전망한 '몬스터' '사이보그' 연작, 대중문화를 통해 현대사회의 묘한 경계선을 허문 '노래방' 프로젝트 등으로 99년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현대미술전 특별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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