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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와 외로움 눌러주는 지옥같이 독한 혼돈주-‘캐리비안의 해적’(고어 버빈스키, 2003·06·07)의 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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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07면

‘캐리비안의 해적’ 1·2·3편(고어 버빈스키 감독, 2003·06·07)을 보면서 나는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물섬』의 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네버랜드’라는 작은 섬에서 고아 어린이들·요정들과 어울리면서 해적 후크 선장과 전쟁, 혹은 전쟁놀이를 하며 산다.

임범의 시네 알코올

여기서 네버랜드를 카리브해 전체로, 나아가 이 세계 바다 전체로 확장하고 해적 선장을 후크 한 명에서 바르보사, 데비 존스, 샤오팽 등으로 늘리면 어떻게 될까. ‘캐리비안의 해적’이 되기에 부족한 게 있을까. 죽지 않는 후크 선장이나, ‘캐리비안…’에서 이미 죽어버린 바르보사, 심장이 뽑혀 나간 데비 존스 선장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들과의 싸움은 전쟁이라기보다 전쟁놀이처럼 보인다.

다음은 주인공 캐릭터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 가족이나 집단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고 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가난·질병·전쟁(진짜 전쟁) 등등의 비극으로부터 도망쳐 다니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세에서는 그러기 힘들기 때문에 피터 팬은 성장을 멈춘 채 세상과 동떨어진 네버랜드 안에 묻혀 산다.

‘캐리비안…’의 주인공 잭 스패로 선장(조니 뎁)은 이미 다 커 버렸다. 그럼에도 그 역시 조직이나 공동체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가족도 없고, 사회의 어떤 조직에도 발 담그지 않는다. 말이 해적이지, 유머가 있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그에게서 공격적인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떻게 선장이 됐는지 모르지만, 부하 선원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어서 위기가 닥치면 혼자 도망치기 일쑤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바다와 육지를 떠돌며 놀려고 한다.

속세의 질서와 전혀 다른 질서, 혹은 무질서의 세계를 무대로 삼고, 거기서 판타지에 가득 찬 모험을 하는 주인공이 속세로 돌아오려고 하거나 속세의 질서를 그곳에 심으려고 하기는커녕 그 세계 안에서 끝없이 놀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 텍스트는 닮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된다. 먼저 두 주인공 사이의 큰 차이점. 피터 팬과 달리 잭 스패로는 럼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냥 술이 아니라 럼을!

나는 피나콜라다나 모히토 같이 럼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은 종종 마셨어도 스트레이트로 럼을 자주 마셔보지는 않았다. 한번 스트레이트로 럼을 많이 마셨던 다음 날, 머릿속에 어지러움이 오래 남았다. 달큰하면서 비릿한 알코올 향이 여느 독주보다 강하고, 그게 입에 붙는 날에는 그만큼 더 잘 들어가지만 술을 깨기까지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육체적으로 건장한,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더 좋아할 것 같고, 그래서 뱃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것 아닐까 싶다.

럼의 역사에도 그런 기록이 나온다. 럼이 처음 만들어진 게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 섬인데, 17세기 중반에 나온 이 섬의 한 문건은 럼이 “독하고, 지옥 같고, 끔찍한 술”이어서 그 별명이 ‘악마를 죽인다’는 뜻의 ‘킬 데블’이라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도 좀 더 정제된 럼이 나오기 전인 19세기 중반까지는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잡는 카페에서는 내놓지 않을 만큼 싸구려 술로 취급됐다고 한다.

럼의 어원이라는 ‘rumbullion’이라는 말도 소동·난동을 뜻한다. 그러니까 19세기 중반 전까지 럼은 마실 때 독하고, 취하면 소동이나 난동을 부리게 하고, 깰 때는 지옥 같은 술이었다는 말인데, 18세기 해적들은 그 럼을 마셨을 거다.

영화에서 잭 스패로도 그 럼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한다. 마실 땐 그렇다 쳐도 깰 때의 그 지옥 같은 고통은 어떻게 할까. 집도 절도 없이 돌아다니는 이들이, 특히 잭처럼 특별한 권력욕도, 별달리 집착하는 대상이나 가치도 없어 보이는 이가 광란의 취기에서 깨어날 때 밀려오는 허무함과 외로움을 어떻게 견딜까.

잭은 혼자 있을 때 자기 분열 증상을 겪는다. 3편에서 그가 혼자 ‘이 세상 끝’에 갔을 때, 그 분열은 극에 달한다. 영화는 코믹하게 그리지만, 이건 끔찍한 이야기다. 하지만 잭은 멀쩡하게 다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며 논다. 이쯤 되면 대단한 내공이다.

잭의 이런 내공에 힘입어 ‘캐리비안…’은 이야기를 달리 풀어간다. 『보물섬』에서 피터 팬은 속세에 사는 웬디를 판타지의 세계로 데려갔다가, 다시 속세로 데려다 준다. 두 세계는 더 이상 충돌이 없다. ‘캐리비안…’에선 속세에서 해적의 세계로 들어온 엘리자베스를 따라 영국군들이 쳐들어온다. 이런 두 세계의 충돌로 인해 해적 세계도 질서가 재편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거기서 잭은 해적 세계의 총책을 맡을 것을 요구받게 된다.

잭은 자신이 공유하고 있던 피터 팬의 비타협성, 집단에 편입돼 그 집단을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버릴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자신과 달리 사랑이라는 가치의 고결함을 믿어 마지않는 다른 남자에게 그 책임을 잽싸게 떠넘기고는 전처럼 이렇다 할 집착 없이, 필요하면 배도 버리고 여자도 버리면서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는 럼으로 무장한 피터 팬이다. 럼이 주는 혼돈의 힘으로 허무와 외로움을 누르면서 끝없이 놀려고 하는.

영화의 무대인 카리브해에선 지금 럼 전쟁이 진행 중이다. 럼의 대표적 상표 바카디와 미국이 그 한 편에 있고, 반대편엔 쿠바와 프랑스가 있다. 파쿤도 바카디가 19세기 중반 쿠바에 세운 바카디사는 럼의 품질을 한 단계 상승시키면서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한 세기 지나 카스트로의 좌파 정권이 들어서서 모든 시설을 국유화하자 바카디사는 푸에르토리코로 회사를 옮겨 럼을 생산하면서 카스트로 정부를 와해시키려는 CIA의 공작을 열렬히 지원했다. 심지어 쿠바의 정유시설을 폭격하기 위해 회사가 직접 폭격기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사이 쿠바 정부는 ‘아바나 클럽’이라는 기존의 럼 브랜드를 국유화하고 프랑스의 한 주류회사와 합작 생산해 매출이 급증했다. 그러자 바카디사는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아바나 클럽 상표의 원래 소유자에게서 사용권을 매입했고, 이로 인해 아바나 클럽 상표의 사용권을 둘러싼 쟁송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는 쿠바산 아바나 클럽이, 미국 안에서는 바카디사가 만드는 푸에르토리코산 아바나 클럽이 팔리고 있다.



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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