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풀뿌리 민주주의'의 위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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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역대정권은 대선.총선 등 선거가 끝나면 관례처럼 논공행상으로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인사의 잣대는 「선거에 끼친 공로」였다.여당에 몰표가 쏟아진 지역의 단체장은 승진하거나 영전했고 야당이 「싹쓸이」한 지역의 단체장은 좌천의 고배를 마시는 경우가허다했다.때문에 선거철이면 전국 시.도의 단체장들은 집권여당의바람잡이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언제나 구호에 그쳤고 관권개입시비의 악순환은 그치지 않았다. 4.11총선이 막을 내렸다.이번 총선은 전례가 드물게 다양한 기록을 남긴 선거였다.여당이 사상 최초로 서울의 대접전에서 승리를 거뒀고 정치신인의 대거진출로 정치권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이들 모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었지만 이번 선 거에서가장 바람직한 변화를 든다면 그것은 선거철이면 되풀이 됐던 관권개입 분쟁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라는 생각이다.
14대 총선 때만 해도 서울시장은 일선구청과 동사무소는 물론통.반장 등 행정조직을 총동원해 「표심(票心)」을 수시로 파악하고 이를 보고하느라 청와대를 들락거려야 했다.그러나 지난 선거기간중 조순(趙淳)서울시장은 흰눈썹을 휘날리며 당산철교.양화대교 등 부실교량 현장을 점검하기에 바빴다는 소문이다.
이인제(李仁濟)경기도지사는 선거운동 기간전에 소속당인 신한국당 지구당 창당대회에 얼굴을 내밀었다가 야당으로부터 집중공격을받았다.그후 그는 공식적인 도정관련 행사를 제외하고 유세장은 물론 크고 작은 일체의 모임에 발길을 끊었다 한 다.다른 지자체장도 사정은 비슷했다.중앙당 공천을 받고 당선된 단체장으로서소속 정당후보의 개인연설회정도는 참석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얼굴한번 잘못 내밀었다가 구설수에 휘말릴 경우 역효과가 더 크기 때문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들이다.
심지어 인천동구청장은 선거기간중 대보름맞이 축제를 개최했다가선거에 영향을 주는 관주도행사를 강행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그래서 일선 시.군은 봄맞이 체육행사는 물론주민대상 교양강좌까지 취소해야 했다.
그렇다고 관권개입 잡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것은 아니다.25개 구청장 대부분이 야당소속인 서울에서는 과거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역(逆)관권 시비가 일기도 했다.중앙정부가 구청장들이 야당후보를 교묘하게 간접지원하고 있다며 단속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또 선거가 끝나자 국민회의는 서울에서의 패배요인중 하나가검찰.경찰의 선거개입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마찰이 선거결과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분명히 중앙집권 체제아래서는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선거풍속도였다.이같은 변화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엄격한 선거법과 여야 구분없이 법을 집행하려 애쓴 중앙선관위의 의지와 노력이 그 원동력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사실 선거기간중 선관위가 보여준 불법선거 방지를 위한 노력은 돋보이는 것이었다.그것은 관권개입을 차단하는데 큰 몫을 했다.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이같은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위력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선거법이 엄격하다 하더라도 중앙정부가 선거결과에 따라전국의 시.도지사를 승진시키거나 좌천시킬 수 있는 인사의 보도(寶刀)를 쥐고 있었다면 이번 선거에서도 그들은 집권여당의 입과 귀로서의 악역을 담당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조순 서울시장을 비롯한 일부 자치단체장들이 총선에 앞서 당당하게 정치적 중립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관선시장이 아닌 민선시장이었기에가능했던 것이다.중앙정부보다 민초(民草)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민과 함께 펴는 자치행정의 힘 ,그것이 관권개입 시비를 잠재웠다.그래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가꾸고 지키는 일은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김창욱 수도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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